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항수 Mar 10. 2016

누가 지식에 우선순위를 정하는가

2014. 03. 27.

일과를 마치고 나니 무척 피곤했다.

눈이 감기고 기력이 나지 않았다.

갑자기 왜 그럴까.

요즘 잠을 줄여서일까?

아이들에게 기운을 너무 쏟은 걸까?


사실 답을 잘 알고 있다.

지금 상황에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다.


내 무력감의 원인은 어떤 이유가 됐든 교과서를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이 자꾸 수업을 흔들어 놓기 때문이다.

여전히 수업에서 교과서를 사용하는 빈도나 정도는 미미하지만 나로서는 그것 자체도 못마땅한 것이다.

사회의 인식과 평가에서 자유로워지려고 노력하지만, 여전히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내 모습을 보며 무기력해진 것이다.


도대체 누가, 감히 지식에 우선순위를 정한 것인가.

어떤 것을 배워야 하고, 배우지 말아야 하는지 정해 놓는 것인가.

정확한 사실도 아니고, 그리 필요하지도 않은 정보를 외워야 하는 이 무책임한 현실을 누가 만들어 놓은 것인가.


교사가 진정으로 가르쳐야 할 것은 오로지 하나, 배움의 즐거움뿐이다.

배움은 곧 삶을 뜻하는 것이니 결국 교사는 가르치는 존재가 아니라 먼저 살아간 사람(先生)으로서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며 삶의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존재인 것이다.

*지금은 삶이 곧 배움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철학적 관점에서는 덜 여문 진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슬로건으로서는 유효하다.


그래도 속의 말을 내뱉으니 조금은 편해졌다.

이래서 일기를 쓰나 보다.


불편한 마음을 잔뜩 표현했지만 객관적인 시선에서 보면 오늘도 참 괜찮은 하루였다.

이집트 문명이 시작되면서 왜 분수가 중요해졌는지 이야기를 나누고, 아이들끼리 협력하여 분수의 개념을 잡고 이전 내용을 복습했다.

어제 아이들이 헷갈려하던 구석기와 신석기 / 호모 에렉투스와 호모 사피엔스 종이 살아가던 시기의 관계를 사용한 도구를 중심으로 정리하고 더 나아가 청동기와 고조선 시대에 대해 알아보았다.

단군신화를 옛 이야기 들려주듯 짚어가며 고조선의 건국 상황과 연결하여 이야기해주니 아이들은 어느새 상상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교과서를 살펴보며 내용을 정리하게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이때부터 조금씩 기분이 처졌던 것 같다.


오후에는 전구와 지구본을 이용하여 자전 현상에 의해 낮과 밤이 생기고, 태양이 뜨고 지는 현상을 유추하게 하였다.

그리고 만약 지구의 자전이 멈춘다면 어떻게 될지 영상으로 보고 짧게 생각해보았다.

(http://www.youtube.com/watch?v=b5ziT4LGli8)


하루를 돌이켜 보니 이렇게 축 늘어질 이유는 없구나.

나는 비록 사회 인식과 제도에서 자유롭지 못한 일개 교사일 뿐이지만, 아이들이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하루하루 성장해가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으니. 

미약한 내가 주저앉지 않고 걸어갈 수 있도록 그들에게 따스한 사랑을 듬뿍 받고 있으니.

매거진의 이전글 드디어 교과서를 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