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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항수 May 16. 2016

침묵은 금이 아니다

2014. 6. 2.

교실은 후덥지근한데 바람이 너무 강해 창문을 열 수가 없었다.

불쾌지수는 끝을 모르고 높아만 갔다.


정말 오랜만에 내준 숙제를 검사해보니 반 정도만 해왔다.

그마저 제대로 한 아이는 몇 되지 않았다.


방송실 업무를 마치고 돌아오니 S가 울고 있었다.

J가 마시던 우유를 자신의 우유와 섞어서라고 했다.

J를 불러 사정을 물어보니 S에게 때리지 말라고 해도 계속 때렸다고 했다.


매주마다 강당에 모여 진행하는 애국주회 때문에 2년째 학교 일정이 어긋나 선생님과 학생 모두 불만이 많았다.

그러다 몇 선생님들의 노력 끝에 오늘부터 방송으로 애국조회를 하게 되었다.

어렵게 얻은 기회를 놓치지 말자고 신신당부를 했건만, 아이들 대부분이 방송을 듣지 않고 엉망이었다고 했다.


이 혼란을 정리해보려고 분필끼우개를 집었는데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이 망가져 있었다.

작년 동학년 선생님들끼리 기념으로 장만한 것인데.


망가진 분필끼우개를 아이들에게 보여줬더니 아이들은 그 모양이 우스꽝스러웠는지 하하 웃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나는 교실 구석으로 분필 끼우개를 던졌다.

무더웠던 교실은 순식간에 차가운 곳으로 변했다.

아이들은 처음 보는 나의 모습에 경직됐다.


낮은 목소리로 아이들을 책망하기 시작했다.

내 소중한 물건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본질은 아이들이 책임에 대해 무감각해진 것이었다.

최근 들어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책임- 청소, 약속마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여러분들에게는 권리와 책임이 있어요.

권리를 마음껏 누리는 것은 여러분들의 자유죠.

하지만 책임을 다하지 않아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자유인가요?

책임을 지킨 사람은 뭔가요?

왜 그 사람이 피해를 받아야 하나요?"


나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물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글로 쓰도록 했다.


아이들이 영어실로 간 후 아이들의 글을 하나씩 살폈다.

대부분이 이제는 강제적으로 책임을 지키게 하자는 의견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M의 글이 나를 정신 차리게 했다.



어떻게 내가 예전에 하던 방식을 그대로 썼을까.

비록 일 년에 한두 번 했다지만,

좋은 방법이 아님을 알면서도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던 방식이었다.

그래.

이번에는 그러지 말아야지.


점심시간이 되어 영어실로 아이들 마중을 갔다.

아이들은 눈치껏 평소와 달리 빠르게 줄을 섰다.

식사를 마치고 교실로 돌아오니 아이들이 청소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참 편하다.

그러나 이 편함의 위험을 알기에 불편하다.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아 수업 시작보다 10분 일찍 모이게 했다.

먼저 양해의 말을 건네고 회의를 시작했다.


우리끼리 생각을 모아보자는 의견과 이제는 선생님이 정해준대로 하자는 의견이 대립했다.

좀처럼 차이가 좁혀지지 않자 내가 말을 꺼냈다.


"사실 강제로 하면 선생님도 편하고 너희들도 편해.

기준에 맞춰 할 일만 하면 되니까.

그런데 왜 선생님은 강제로 하지 않으려고 노력할까?"


"우리들이 기분 나쁘지 않게 하기 위해서요."

"그런 점도 있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강제에 익숙해지면 생각을 하지 않아서 그래."


아이들에게 요즘 지키지 못하는 책임이 어떤 것이 있냐고 물었더니 열 가지가 넘게 나왔다.

각각을 지키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강제하면 되냐고 물었다.

아이들에게 익숙한 규칙과 벌이 나왔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강제로 하자고 했으니 지금껏 나온 의견을 고려해서 선생님 뜻대로 하면 되죠?"

아이들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휴대폰을 사용하지 않고 간식도 먹지 않으며 청소, 숙제, 알림장 등의 책임은 모둠 연좌제 형식으로 하자고 했다.

아이들은 작은 목소리로 그러자고 대답했다.


"정말 이러면 행복하겠어?

선생님이 지난주에 이야기했잖니.

싫은 건?"

"바꾸라고요."

"그럼 이게 부당한 줄 알면서 왜 아무도 말을 하지 않니?"

그제야 아이들은 불합리한 부분을 지적하기 시작했다.


"그래. 이래야 한다.

너희들이 사회에 나가면 더욱 부당한 경우를 겪게 될 거야.

그때 너희들이 직접 소리를 내지 않으면, 변하는 것은 없어."


"이것으로 연기는 마칠게."

생각지 못한 상황에 아이들이 놀랐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규칙은 없었던 거야.

악몽 같은 시간을 겪어보니 어떻니?

선생님이 오늘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두 가지야.

첫째, 싫은 것은 바꾸기 위해 목소리를 내야 한다.

방금처럼 부당한 경우에 침묵하면 변하는 것은 없어.

둘째, 작은 무책임이 쌓이면 그 사회가 무너진다.

그렇지 않도록 자기가 먼저 책임을 다하고 주변이 그럴 수 있도록 도와야 해."


이어 내일 있을 요리 실습을 계획하게 했더니 짧은 시간에 모둠이 힘을 합쳐 역할 분담까지 척척이었다.

내일부터 나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다.

아이들이 책임에 대해 다시 고민하게 됐을 때, 충분히 해낼 수 있도록 꼼꼼하면서도 무심하게 챙겨야 한다.

그 어려운 작업을 하려니 막막하기도 하지만 아이들이 성장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 설레기도 하다.


이번 일로 아이들 마음에는 생채기가 났을 거다.

병 주고 약 주고 하는 꼴이지만, 그 부분에 좀 더 신경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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