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실패는 당신의 기쁨.
2008.11.05 의 기록.
내일은 남편의 생일이다. 즉흥적이고 이벤트를 좋아하는 나는 매사에 계획적이며 예상치 못한 일에 스트레스받는 남편을 만나 그간 특별한 추억거리 없이 그냥저냥 맹숭맹숭 살았다. 그러나 죽으란 법은 없는지 재미없는 남편 대신 내가 뭘 하든 항상 깔깔거리며 웃어주는 최고의 리액션러 두 딸이 있다. 이제 제법 커서 7살, 5살. 놀기 좋아하는 엄마로서는 아이들이 나와 함께 뭔가를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이 여간 기쁜 게 아니다.
그래서 이번 아빠 생일날 셋이서 아빠 몰래 공연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집 안 가득 풍선 장식도 하고
생일 카드도 만들고 커다란 플래카드도 만들어 붙일 예정이다. 그리고... 각각 드레스와 백설공주 옷, 나는 한복이라도 꺼내 입을까? 큰 딸은 피아노를, 작은 딸은 캐스터네츠, 난 트라이앵글을 치면서 선곡한 노래에 율동도 만들어 공연을 하려고 한다.ㅎㅎㅎ 이만하면 멋진 이벤트 아닌가? 다만 문제는.... 남편이 이런 이벤트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데...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사랑하는 딸들이 아빨 위해 준비한 건데 설마 싫어하진 않겠지.
며칠 전 남편에게 물었다.
"자기야 곧 자기 생일인데 뭐 하고 싶은 거 없어?"
"나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제일 좋아."
히잉~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남편을 위해 공연을 취소해야 하나.. 실망할 아이들을 생각하니 속상하다. 남편의 의견은 못 들은 걸로 해야겠다. 아이들을 위해서 진행하자.
어제 늦게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에게 생긋 웃으며 물었다. 목요일이 남편 생일이다.
"자기야 목요일은 일찍 올 거지?"
"참! 나 내일 1박 2일 출장 가"
"그럼 내일 저녁에는 일찍 와?"
"내일은 누구 만나기로 해서 늦을 것 같아"
목요일은 출장 가서 안되고, 금요일은 약속 있어 안되고, 토요일은 애들도 나도 오전, 오후 모두 약속이 있는데 일요일까지 어떻게 기다리지. 나와 딸들은 울상인데 남편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다. 세 모녀가 뭘 하려는지 몰라도 속으로 귀찮은데 잘 됐다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이벤트의 주인공은 남편에서 우리 세 모녀로 바뀌었다. 남편은 우리들을 위한 유일한 관객. 그 한 명뿐인 관객이 바빠 공연이 미뤄질 상황이다. 하는 수 없다. 우리들을 위한 이벤트는 일요일로 미뤄야 할 거 같다. 그 사이 리허설까지 완벽하게 마쳐보지 뭐.
2021.
여기서 그때의 내 일기는 끝이 나 있다. 그 후 공연을 한 기억이 없으니 아마도 그 이벤트는 물거품이 된 것 같다. 어제 식사를 하며 남편에게 오래전 준비하다 취소된 남편의 생일 이벤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남편이 환~~ 하게 웃는다.
그리고
하는 말.
.
.
.
.
"아~~~~ 진짜 다행이다!"
흠.... 뭐 어쩌랴. 남편 생일이었는데 남편이 기뻐해서 다행이다.
나름 행복한 생일이 되었겠네.
흥. 칫. 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