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의 참의미

천주교 성지순례

by 송다니엘

순례란 신앙 행위의 일환으로 종교상의 성지 등을 찾아다니면서 참배하는 여행을 의미한다.


예능 프로그램 ‘스페인 하숙’으로 천주교 신자뿐만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한편 혹자는 유럽여행을 가면 성당 말고는 볼 것이 없다고 불평 아닌 불평을 하기도 한다. 다른 한편, 우리나라에는 그러한 고풍스러운 성당이 없지 않나 하고 생각한다. 내가 그랬다.


사실, 한국 천주교회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평신도에 의해 자발적으로 세워진 교회이다. 그 시작은 19세기 말 청으로부터 ‘서학’이라는 이름이었고, 북경에서 이승훈 베드로가 최초로 세례를 받았다. 나는 북경에서 세례밖에 받지 않는 평신도가 어찌 이벽, 정약용, 권일신 등에게 세례를 줄 수 있었는지 의문을 품었는데, 지금이야 교리에 대하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만큼 우리 교회가 커졌지만, 당시에는 조선팔도 내에 신부가 한 명도 없었으니, 그러한 일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그리하여 ‘우리가 서로 세례를 주는 게 괜찮을까요?’라던지 ‘우리는 제사를 지내는데 괜찮을까요?’와 같은 질문을 청 교구에 문의하였을 것이고, 신부 파견을 요청했다. 그 의문에 대한 지침으로 미신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던 제사가 금지되었고,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입국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본격적인 박해가 시작된다.


당시 척화를 주장하던 집권층 입장을 비춰보면 조상의 위패를 불태운 진산사건, 황사영의 ‘백서’, 오페르트 도굴사건 등으로 미움을 듬뿍 받은 게 이해가 되면서도, 당시 조선 사회의 정치에 철저히 희생, 이용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후,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으로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이래 천주교회는 1891년 약현성당을 시작으로 1895년 인천 답동, 1898년 명동 성당을 건축하였다. 성당의 설계와 감독은 코스트 신부가 맡았다. 당시 성당 건축에 제일 중요한 요소는 벽돌이었다고 한다. 벽돌을 조달하기에 인천항(제물포) 바로 옆에 성당이 생긴 것, 오래된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성당들, 풍수원, 전동, 공세리 성당 등이 비슷하게 생긴 건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

19년 10월. 천주교 성지로 가득 찬 당진에서 신부님이 처음 소개해준 이래, 1년여 동안 많이도 돌아다녔다. 처음에는 성지, 성당들을 가며 순교자들의 믿음, 희생에 감동하고 신앙을 북돋는 계기가 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전국에 있는 장소를 순례하는 것에 대한 권태, 심하게는 환멸까지 느끼고, 애초에 도장 찍는 것으로 변질하여버린 듯한 순례길을 등한시하기도 했다. 제일 큰 위기는 5월에 있었던 사고였다.


‘결투를 하면 할수록 본인보다 손이 빠른 사람(권총을 빨리 꺼낼)을 만날 확률이 높아진다’는 OK 목장의 결투의 대사를 생각하며 비록 내 과실이 없다 한들, 오랜 운전이 사고확률을 높인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리하여 그동안 해온 순례길, 책을 버리려고도 했다. 그도 잠시, 열흘 후에 남도 순례를 마치고, 크나큰 은총을 받은 것을 기억해본다.


사실 수많은 성지는 조선 후기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심한 탓에 교우들은 쫓기고 쫓겨 오지 중의 오지, 산 중턱에 있는 것이 허다하다. 지역도 정말 가지각색. 공교롭게도 우리 국토, 산에 대한 흥미 덕에 산행과 순례를 병행했다. 때로는 아니 보통은 시간이 훨씬 많이 드는 산행이 주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긴 했다만.


‘성지순례는 관광이나 여행이 아니다. 일상에서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는 참회와 회개의 태도를 갖춘다.’


위 말이 무색하게 대부분 여행을 다녔다. 먼 길 끝에 도착한 성지가 무덤만 있으면 도장만 찍고, 애초에 갈 길이 또 멀기에 십자가의 길, 묵주기도는 언감생심. 그런 와중에도 성지에서 가끔 시간이 맞아 미사를 드리면 또 크나큰 은총을 얻고는 했다. 이제 와서 이 모든 게 다 뜻이 있어서라는 생각을 해본다.


꼭 순례길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삶이 그렇다. 시작은 좋은 뜻에서, 원대한 목표, 결과물을 바라보고 시작하지만, 중간중간 어려움을 겪고 ‘이걸 왜 하고 있지.’ 혹은 ‘이게 의미가 있나.’ 등의 회의를 품는다. 학창 시절, 군 생활, 배에서의 생활. 그런 고민과 번뇌의 연속이었고 그 모든 걸 이제와서 되돌아보면 어느 하나 쓸모없지 않은, 나의 자양분이 되었다.


무척이나 긴 1년이었다. 이 모든 것도 배를 탔으면 언감생심. 신앙심, 그리고 본질에서 퇴색되었다는 생각이 무색하게 그 과정, 순례길이 의미가 있었다는 생각을 다시 해본다.


“만일 관광객으로 이곳에 왔다면 순례자가, 순례자로 왔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나가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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