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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변화에서의 Narrative

공학과 사회과학, 그 사이 어딘가에서

by 송다니엘


오랜만에 글을 적어본다. 글을 생각나는 대로 쓰다 보니 주관적이고, 생각의 오류가 많아졌다. 이런 글을 올린다는 것 자체가 깊이가 부족하다는 생각과 함께 내공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다 보니 올리는 것보다도 쓰는 행위 자체에 소홀해지게 됐다.


Narrative라는 단어로부터 시작해본다. 이야기, 서사라는 뜻인데, 이를 기후변화의 관점에서 보자면, 기후변화를 이끌어가는 담론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주중에 이 내래티브라는 개념 아래, 어떻게 기후변화를 바라보는지에 대한 사회과학 분야의 초빙강연이 있었다. 여러 가지 층위의 개념, 정의가 많았는데, 그중 핵심이라면, 사회과학, 자연과학, 공학, 시민단체 등 모든 Agent에 있어 특정 개념을 협의하여 정의하고, 이를 하나의 큰 담론, 이야기로 만들려고 노력한다는 거였다. 누군가는 이런 질문을 했다. 그렇다면 내래티브가 발전되는 과정은 어떤 거냐고. 강연자는 이것이 정책으로 반영이 되었을 때라고 이야기했는데, 지금 이순간, 그에게 하고 싶은 질문은, 그렇다면 특정 개념, 내래티브가 정책에 반영되었을 때, 이것이 일반 대중들이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데에는 분명히 괴리가 있는데, 그 괴리는 내래티브가 덜 발전해서인지, 아니면 그건 또 다른 차원의 문제냐고.


물론 그 강연자가 어떤 답변을 해도, 나로서는 동의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덜 발전해서, 즉 내래티브가 사람들에게까지 전해지지 않아서라고 해도, ‘그럼 어떻게 전할 건데?’, ‘그것의 괴리는 분명히 있지 않겠는가.’ 하는 의문과 다른 한편, 다른 차원이 있다고 한다면, 그럼 내래티브가 무슨 소용이냐, 그냥 정책을 반영하는 것까지가 이것의 역할인가. 그렇게 토론 많이 하고, 정책을 많이 한 결과가 이 정도냐. 등의 의문이 남았을 듯하다. 이런 내래티브. 새로운 개념에 대해 생각하면 구체적이지 않을 때가 많다. 사실 현실이 그렇다.


이것에 관해 예전에 Agent Based Model 관련된 수업을 들었는데, 간단하게 이는 각 agent의 행동을 특정한 알고리즘으로 분석해 모델을 만드는 방식이다. 한 연구는 이를 이용해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태양광 패널을 집집마다 설치하는지를 조사했는데, 연구 결과 사람들은 정부 정책보다도 실제로 먼저 패널을 설치한 이웃의 이야기에 더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결과물을 얻게 됐다.


이 논리에 따르자면, 내래티브가 발전해 즉 인센티브를 주는 정책 등으로 반영이 되더라도, 사람들의 행동은 정책 때문에 변하기보다도, 옆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거다. 물론 이것도 큰 흐름에서 내래티브라면 내래티브겠다. 그렇다면 내래티브가 발전한다는 게 꼭 정책으로 반영된다고만 알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사회과학은 그런 점에서 내겐 거리가 먼 것이라 느껴졌다.


또, Resilience Engineering이라는 과목을 듣고 있다. Resilience라는 게 무엇이며 어떻게 공학과 관련이 있는지, 이것이 여러 사례를 거쳐 발전했고 이에 대한 많은 학자의 접근 방식을 설명한다. 수업을 듣는 공학도 대부분에게는 이 모든 게 속된 말로 풀 뜯어먹는 소리라고 느껴지는 듯하다. 나로서도 그런 생각을 지우진 못했는데, 이는 도대체 얼마나 더 많은 개념이 생겨나야 하는지, 어떤 한편으로는, UN에서 몇 년 전에 정한 광범위한 Sustainability라는 개념 아래 포함될 수 있지 않은지가 이에 근저했다. 개념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더 실행이 어렵다는 생각에.


한편, 그 개념의 적절성 여부를 떠나 이런 다소 추상적인 개념 자체가 연구될 수 있다는 게 이 사회가 더 열려있는 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설령 수십년, 한 세기가 지나고 이 개념이 폐기될 수도 있다. 보통은 폐기보다도 보완, 발전해나가는 과정이 맞을 테다. 무엇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여러 이야기, 서사가 존재하는 게 학문의 발전과정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공학과 사회과학, 자연과학 등을 아우르는 이런 시도들이 앞으로는 더욱 필요하지 않겠는가 싶은 생각에 여러 새로운 개념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전 모든 학자의 관점에는 공감하지 않더라도.


이 과를 이미 수년 전에 졸업하고 박사 과정을 하는 친구 왈, 누군가 그걸 공부한다면, 물론 추상적일 수는 있지만, 그 개념을 새로 만들 수 있는 이가 될 수도 있지 않겠냐고 한다. 일정 부분 공감이 되는 이야기였다. 이미 많이 정형화된 자연과학, 공학에서 신기원을 여는 건 어렵지 않겠는가.


한편, 공부하다 보면 내 통념의 잘못됨, 일반 대중의 잘못된 인식을 발견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제품에 대한 생산부터, 버려지기까지 모든 환경적인 요소를 분석, 평가하는 분야를 Life Cycle Assessment라고 하는데, 일회용 종이컵과 머그컵, 텀블러에 대한 이 관점의 연구 결과가 있다. 결과는 사실 꽤 놀랍다. 사람들의 통념과 달리 종이컵이 그렇게 환경적인 측면에서 나쁘지 않다는 점. 사실 머그컵을 쓰더라도, 씻어서 써야 하는데, 그 과정 자체가 친환경적이지 않다는 거다. 물론 이를 식기세척기로 씻어서 10번을 넘게 쓰면, 종이컵보다 친환경적이지만, 손으로 씻는 경우엔, 50번은 써야 종이컵보다 환경적이다. 텀블러는 심지어 식기세척기가 아닌 손으로 씻으면 100번 넘게 써도 종이컵보다 더 친환경적이지 않다. 놀랍지 않은가. 그렇게 환경 때문에 일회용품 쓰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데, 정작 텀블러가 별로 친환경적이지 않다는 사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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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예를 들어볼까. 내연기관차와 전기차. 일단 전기차에 들어가는 배터리 때문이라도 생산 측면에 있어 전기차의 탄소 발자국이 내연기관의 그것보다 훨씬 많다. 여기에, 그 전기를 돌리는 게 화석연료로부터라면, 이는 절대, 내연기관차보다 친환경적이지 않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그렇다면, 우린 이 전기차가 과연 깨끗하다고 할 수 있는가.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우리의 통념이 너무나도 잘못되었다는 걸 이 분야가 잘 알려준다. 이런 걸 생각해보면, 사실 사람의 행동 하나하나가 자연을 파괴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결론은 돌고 돌아, 내 내공의 부족함을 깨닫고 이를 채워나가야 한다는 점과 앞으로 이걸 어떻게 사회에 실질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지가 되겠다. 이 모든 게 나는 앞에서 언급한 Agent Based Model 등의 수학적인 모델링을 통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데, 이 전달 방법, 더 많은 분야와의 소통도 중요하다는 걸 깨닫는다. 공부가 내가 공부하는 것도 있지만, 누군가와 함께 하는 게 아니겠는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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