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
현재 배출되는 탄소의 80%에 육박하는 건 에너지 분야다.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선 탄소 중심의 에너지 체계를 전환해야 한다는 건 이제 많은 사람이 아는 논리다. 그리고 이를 전환하기 위한 기술적인 수준은 이미 도달한 지 오래다. 문제는 이를 실천에 옮기는 일.
하지만 과학자와 정치인들은 본인이 연구하는 기술의 효율을 조금 더 올리겠다고, 혹은 규모의 경제의 논리에 빠져 커다란 스케일의 풍력 터빈, 태양광 패널 설치만을 생각하고 있다. 사실 그보다도 더 중요한 건 대중들의 인식이다. 현재 대중의 선택권엔 두 가지의 양극단밖에 없다.
예를 들어, 고기를 먹으면 탄소가 많이 배출되니, 환경을 생각하면 채식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이는 운송 수단에서도 마찬가지. 비행기를 타거나 차를 타는 건 좋지 않은 행동이다. 자전거를 타거나 대중교통을 타야 한다 등등. 이런 이야기를 듣는 일반 대중들은 당장 내일 지구가 망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그런 걸 포기하고 살지 않는다. 그 사이에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권은 아주 모호하다. 어떤 이는 ‘조금은 찔리지만 덜 소비해야지.’ 정도의 스탠스를 취할 뿐.
앞으로 이런 대중들에게 필요한 건, 예를 들어 에너지 문제에 있어, ‘집에서 사용하고 있는 전기, 난방 등으로 이용하는 에너지에 있어서 탄소가 대략적으로 얼마만큼 배출이 되니 이 정도의 환경부담금을 내야 한다.’처럼, 이를 운송수단 등 모든 곳에 적용해야 한다. 당장 고기를 안 먹으면 매년 몇 톤의 이산화탄소 배출 절감 효과가 있다는 이야기는 대중에게 와닿지 않는다. 그들이 필요한 수치, 즉 합리적인 사회 내 합의를 통해 구체적인 수치로 다가가야 한다.
이런 말이 있다. ‘측정하지 않으면 관리할 수 없다.’ 우리는 매년 이산화탄소 배출에 대한 데이터를 측정하고 있지만, 일반 가정 내 얼마만큼의 에너지가 사용되는지 측정하지 않는다. 그나마 정확한 건 전기인데, 이건 각국에서 한국전력과 같이 전기를 분배하는 곳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줄줄 새고 있는 에너지를 전기로 전환하여 수치화하는 건 물론이고, 그 전기의 뿌리, 즉 1차 에너지가 무엇인지 추적해 에너지원에 따른 탄소세 등의 가격을 부과한다면 환경을 이야기하는 게 그저 공수표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전환에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이 모든 걸 수박 겉핥기식으로 아는 경영 전공자가 아닌 기술의 핵심적인 요소를 이해하는 엔지니어가 이에 참여할 때 변화를 끌어낼 수 있을 테다. 이런 수단 중의 하나가 수학적 모델링일 테다.
아버지는 팬데믹 초기에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보다 더 잘 대응할 수 있었던 건 다름 아닌 전문가들의 수학적 모델링을 정부에서 참조해서 대응했다는 점이라고 꼽는다. 이것이 우리 사회가 훨씬 과학적인 접근 방법을 하는 거의 전례 없는 사례였다고. 단순히 연구자, 교수들이 학회에 논문 내고 실적에 집착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사회에 더 도움을 줄 수 있는 방향으로 연구를 할 때,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 거라고 하는데, 그런 이유로 아버지는 몇 년 간 학회에 제출하는 논문보다도 이런 일을 더 해왔다고.
한편, 아버지와 아버지 친구가 하는 이야기가 인상 깊었다. 그동안 에너지 분야에 몸을 담지 않았던 이들이 이를 시작하면서 아주 원대한 목표를 가지고 접근하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은 그걸 집행하는 데 있어서 기술적인 한계가 대단히 크다고. 이를 사람들은 잘 모른다고 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실패했지만 너는 우리보다 나아야 하지 않겠냐고 한다. 라이프치히에서 만났던 생도 때 교수님께서 하셨던 말이 떠오른다.
“그 누구도 본인의 어깨를 밟을 수 없다.”
이 말인즉슨, 아무리 뛰어난 이도 이 모든 걸 다 해낼 수 없으며, 이전 세대 학자의 연구를 바탕으로 하여, 즉 그 어깨를 밟고 연구를 진전하는 것이며, 본인도 후대를 위해 어깨를 내어주는 역할만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전의 연구가 있었으니 우리가 이만큼의 인식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아무쪼록 중요한 건 효율과 경제보다도 이를 사회에 어떻게 실현하느냐다. 되도록 빨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