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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독 바다청년 Jul 26. 2023

나의 해방일지


근래 크고 작은, 그리고 굉장히 다방면의 일들로 많은 고민을 이어갔다.


그 중에는 그다지 의미 없다고 생각한 과목의 프로젝트가 있었다. 구성원들이 내가 생각하는 만큼 빠릿빠릿하게 움직이지 않으니 그간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며칠간 계속 쪼니 그들이 움직였다. 어쩌면 그들이 움직인 건 내가 쪼아서가 아니라 데드라인이 눈앞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막판에는 그들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열심히 했고, 그 결과로 발표가 훌륭했는데, 이 또한 큰 후련함을 느끼게 했다.


무엇보다 개인적으로 대학에서 학기말 과제로 평가받는 발표는 처음이었으니 나로서도 내가 잘하려는지 생각도 있었다. 사실 그동안 발표가 그다지 중요한 발표가 아니었던지라 준비를 덜 한 부분도 있지만, 발표하는 나의 모습이 스스로 부족하다고 생각했기에 개인적으로 부담도 있었다. 하지만 생각 이상으로 내가 발표를 잘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군대에서 매리 같이 수도 없이 브리핑하던 짬밥이 어디 가지 않더라. 그동안은 한국어로만 해서 영어로 하는 건 아직 내공이 부족한가 싶었지만, 그것보단 연습과 내 마음가짐의 문제였다. 생각보다 내가 블라블라를 잘한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졸업하고 컨설턴트를 해도 괜찮겠다는 생각도 해봤다.


이어서 두 번째 과제. 역시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과목이 흥미 없는 것보단 가르치는 이의 문제가 컸다고 생각했는데, 어제 이 과목의 마지막 수업을 듣는데 마지막쯤 되니 그래도 무언가 남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미 없다고 불평불만을 가지기도 했으나, 어찌 됐든 한 학기 내내 매 수업 꾸역꾸역 자리에 있었던 게 한 분야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


수업은 그렇고, 이 과제는 아예 아무것도 참여하지 않는 이와 참여는 하지만 서투른 이, 그리고 내 사수까지 네 명이 같은 조 구성원이다. 사수도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은지라, 여러 번 푸시를 해봐도 그다지 좋은 결과물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역시 그냥 해치우자는 심정으로 마무리되지 않은 코딩 부분을 내가 다 해결했다. 다 끝내고 나니 후련하다. 아무것도 참여하지 않은 이는 괘씸해서 아예 이름조차 빼버리고 싶은데 그렇게 하면 적을 만드는 셈인가 싶어 다소 꺼려졌다. 어찌 됐든 끝냈고,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럭저럭 발표도 잘 마무리 지었다.


이렇게 첫 번째 학기 한 과목, 이번 학기 두 과목을 들으며 내 석사 프로그램 중 하나의 축인 Resilience Engineering의 공부는 마쳤다. 최초엔 이 개념 자체가 생소했고 이 개념을 알게 되고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생각했으며 이번 학기엔 대체 왜 이 과목을 들어야 하냐며 회의도 품었지만 다 마치고 나니 뿌듯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꼭 Resilience라고 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 축 중의 하나였던 Risk Management, Design, Monitor라는 개념을 알게 되고, 이에 대한 프로젝트로 덴마크의 다리를 발표했던 점. 사실은 이게 건축이나 도시공학을 전공하는 이에게 더 알맞은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했던 정역학과 관련된 개념도 다뤘고, 큰 시스템이라는 그림을 그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전부터 꾸역꾸역 배우던 게 다 도움이 됐다.


다음으론 Graph Theory, ABM (Agent Based Model)을 바탕으로 Resilience를 접근했던 것도 의미가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남은 프로젝트는 팬데믹 당시와 그 전과의 교통량을 비교하는 데이터를 분석하고, 그 변화량이 ABM의 기본이 되는 Cellular Automata을 바탕으로 하는 Nagel Schreckenberg Model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에 대한 과제인데, 처음만 해도 이걸 왜 하나 싶었지만 데이터를 하나하나 뜯어보는 것부터 여러 가지 그래프를 그리는 게 누구보다 시간은 많이 투자했고, 그 모든 게 장기적으로 도움이 됐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글을 적고 학교에서 축제한다고 하여 슬쩍 가봤더니 과제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뺀질거리던 이가 맥주를 마시고 있다. 합석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도둑이 먼저 제 발 저렸는지 본인이 그간 그룹 프로젝트에 관심을 두고 하고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기특하다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시키면 하긴 한다. 워낙 알아서 잘하면 내가 이야기할 일이 없을 텐데 아쉽긴 하지만 뭐라도 하는 게 어디냐 싶기도 하다. 그렇게 간만에 학과 동기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저번 학기 태양광 에너지를 가르치던 교수도 합석한다. 역시 나이를 먹을수록 말이 많아진다는 이야기가 맞는지, 연세가 지긋하신 교수님은 만담꾼의 기질을 잘 보여준다.


본인 할아버지가 광산업에 종사했다고 수업 때 이야기했던 건 기억하고 있었는데, 역시 그 옛날이야기를 다시금 한다. 그는 고향이 도르트문트인데, 20세기만 해도 도르트문트를 비롯한 루르 공업지대가 독일 산업의 중심지였고, 그 당시만 해도 현재 독일 경제 중심지 중의 하나인 바이에른에 산업이 굉장히 열악했다고 한다. 그래서 라인강 유역의 서독일에서 남부 바이에른에 보조금을 계속 붓는 상황이었는데, 그 덕에 많은 첨단산업을 발전한 바이에른이 지금은 독일 최고 부자 동네가 되었다. 현재 통독 이후 제일 많은 보조금을 받는 곳이 베를린인데, 바이에른에서 번 돈이 베를린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는 셈이다. 어쩌면 지금의 투자로 베를린이 나중에 독일 전역을 먹여 살릴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걸 보면 각 동네의 흥망성쇠가 느껴진다고나 할까.


하나의 일화로, 그 루르 공업 지대에 사람이 많이 살았으니 독일인들이 제일 사랑하는 스포츠, 축구 클럽도 많았다. 그 지역 중 상대적으로 크지 않은 겔젠키르헨라는 도시가 있는데, 그 도시에 있는 샬케04는 사실 독일 축구클럽 중에서도 명문 구단 중의 하나이다. 샬케는 애초에 광부들이 자발적으로 구성한 구단인데, 이 팀이 명문이 될 수 있었던 이유가 원래는 광산에 들어가야 할 이들 중에서 축구를 시키니, 축구를 하는 이들이 다시 광산에 들어가기 싫어서 열심히 했다는 우스갯소리를 교수는 했다. 그러고 보니 맞는 말인 것처럼 느껴진다. 한때는 분데스리가를 호령하던 샬케 구단이 현재는 2부리그 강등을 했으니, 어쩌면 석탄 산업 이후의 제대로 된 산업 아이템을 찾지 못한 몇몇 도시가 쇠락의 길을 걷는 것이 축구 구단의 흥망성쇠와 맞닿아 있다는 생각도 든다. 축구와는 무관하겠지만, 그런 도시로 친다면 우리나라의 태백, 영월, 문경 등이 그런 사례이지 않을까.


반세기 전, 석탄과 철강 산업이 독일의 젖줄이었다면 이제 독일이 자랑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사실 배터리나 태양광 산업도 아시아와 북미에 중심이 있고, 기술만 따지고 봤을 때 독일이 북미나 아시아에 월등히 우위에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뒤지고 있는 게 맞는지도 모른다. 성장동력은 적은 듯하고, 누군가는 그래서 유럽이 병들고 미래가 없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적어도 나만큼은 이곳에서 여유롭게 살 수 있는 게 참 좋다는 생각이 든다.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돈을 좇지만, 철학적인 고민을 하는 곳. 모든 게 일류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많은 권리가 보장되고 안정적이라는 점.


주저리주저리. 이런 게 근래 무료하고 답답했던 내 일상의 해방일지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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