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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독 바다청년 Aug 01. 2023

스트라스부르 답사기

유럽연합의 중심인 독일과 프랑스의 특별한 관계


스트라스부르가 속해 있는 알자스 지방은 독일과 프랑스가 피 터지게 싸웠던 전장이었던만큼 그 주인의 손바뀜도 자주 있었던 곳이다. 그런 이유로 지금은 프랑스 땅이었지만 독일의 영향을 곳곳이 볼 수 있다. 이름부터 Strasbourg, 독일어로 거리를 뜻하는 Straße와 성 혹은 마을을 뜻하는 Burg가 합쳐진 이름으로 ‘도로의 마을 혹은 성’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 대성당은 독일 건축의 진면목이었고 유구한 역사를 지닌 대학은 독일 학교였다. 그리고 이곳 출신의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의 제1외국어는 영어가 아니라 독일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 뿌리부터 알아볼까.


유럽 역사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듯, 이곳도 로마 시대부터 등장한 도시였다. 라인강과 도나우강을 국경선으로 강 주변에 군사기지를 만든 로마이기에 스트라스부르도 그중 하나였던 셈이다. 이 예로, 쾰른, 비엔나, 부다페스트 등의 예가 더 있다. 그때의 이름은 Argantorati로, 도시 내 이 이름을 사용하는 것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로마 멸망 이후, 스트라스부르는 지금의 독일과 유사한 신성로마제국의 자유제국도시가 되었는데, 이는 봉건시대에 영주에게 그 영토가 귀속된 것과는 다르게 황제의 직속으로 속해 있는 도시이기에 더 자치권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거의 900년을 신성로마제국의 영토에 속해 있던 도시는 1681년, 태양왕 루이14세에 의해 프랑스 영토로 복속된다. 이후 1871년 프랑스-독일 간의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하면서 프로이센 영향 아래 통일한 최초의 도이칠란트가 이 영토를 다시 빼앗아간다. 그리고 그 영토를 1차 세계대전, 독일의 패배로 프랑스가 다시 빼앗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1940년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손쉽게 굴복시키며 이 땅을 다시 빼앗는다. 마지막으로 나치 독일이 패망하며 다시 프랑스가 이 영토를 빼앗으니 이렇게까지 손바뀜이 많았던 땅도 역사에 흔치는 않을 테다.


요약하면, 스트라스부르는 역사적으로 신성로마제국(현재 독일) - 프랑스(루이14세) - 독일 – 프랑스 – 독일 – 프랑스의 영토였다.


이런 역사만큼 프랑스와 독일의 흔적이 매우 섞여 있는 그야말로 프랑스-독일 혼종의 도시이다. 그렇다면 먼저 독일의 흔적부터 찾아보자.


1538년 설립된 스트라스부르 대학은 파리를 제외하고 프랑스 최고 명문 학교 중의 하나로, 이를 거쳐갔던 인물들에는 괴테, 메테르니히, 파스퇴르, 슈바이처 박사 등이 있다. 축구감독으로도 유명한 아르센 벵거도 이 학교 출신이다. 그리고 그 성당은 건축기간만, 1015년부터 1439년까지 무려 400여년에 걸쳐 건축되었고, 빅토르 위고는 물론이고 괴테까지 이 대성당을 극찬했다. 직접 가서 보니 그 스케일은 물론이고 외부의 건축이 가히 고딕 양식의 정점에 있다고 느낄 수 있었다.



초기 인쇄소의 중심지 중에 하나였던 곳으로, 대성당 옆 광장 이름이 구텐베르크 광장인 것도 인상적이다. 더불어 이곳 시내에 있는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의 성당에는 모차르트가 직접 연주한 오르간이 있기도 하다. 그리고 이 오르간을 슈바이처 박사도 연주했는데, 슈바이처 박사가 오르간도 연주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기도 한다.

다음은 프랑스. 프랑스적인 섬세한 감성은 도심 내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건축 양식은 분명 독일의 그것과 유사한데 훨씬 더 세련된 게 프랑스 특유의 미적감각이 반영되었다고나 할까. 제일 유명한 건축물 중 하나인 Ponts Couverts. 그리고 이 옆에 있는 Barrage Vauban (보방 댐)을 주목한다. Vauban은 태양왕 루이14세 시절 프랑스군의 원수였는데, 그는 단순히 군사 전문가뿐만 아니라 엔지니어로서도 훌륭한 재능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가 만든 군사적 요새는 프랑스 전역에 아직도 남아있는데, 그 요새의 개념은 군사적 패러다임을 바꾼 것이기도 하다. 지금은 그의 건축물을 단순히 군사적인 측면에서만 바라보지 않는데, 이는 현대의 건축 개념처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 편리도 고려했다는 점에 기인한다. 이런 영향을 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프랑스 주둔 점령지였던 독일 프라이부르크 내에 있는 세계에서도 손꼽는 친환경 마을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 마을의 이름은 Vauban.

더불어 1792년 프랑스 혁명 정부가 오스트리아에게 선전포고하는 당시 작곡됐던 프랑스의 국가인 La Marseillaise가 작곡된 것도 이 도시에서다. 원제목은 라인 군을 위한 군가(Chant de guerre pour l'Armée du Rhin, War Song for the Army of the Rhine)였다,


마지막으로 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프랑스, 독일의 특별한 관계, 즉 그들의 화해가 유럽통합의 첫 단추이자 이것이 유럽연합으로 이어졌다는 점을 주목한다. 이렇게 독일과 프랑스의 역사적인 악연이 있었던 곳이 역설적으로 이와 같은 유럽연합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다는 생각을 스스로 해봤다. EU의 본부가 있는 브뤼셀부터 룩셈부르크, 프랑크푸르트까지를 포괄하는 유럽연합의 주요 4대 도시가 있는 이곳이 이 통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느꼈다. 실제로 그곳을 방문하니 국제기구가 있는 제네바, 본과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다.



사실 필자는 4년 전에 파리 여행을 하며 당일치기로 콜마르와 함께 이곳을 방문했지만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어쩌면 체류하는 시간이 너무 적어서 그랬을 수도 있고, 나의 내공이 부족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이유로 지금 한 시간 안팎의 거리에 살면서도 도무지 방문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사는 이곳과 비슷한 유형의 도시라고 생각했을 뿐.


독일의 흔적이 있으면서도 프랑스 특유의 섬세한 감성이 살아있는 이곳은 투박한 독일의 그것보다 훨씬 세련됐다. 물론 내가 살아가는 도시는 사랑하지만, 도심 내의 건축물들의 아름다움은 이곳 프라이부르크와 스트라스부르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스트라스부르가 뛰어나다. 이곳에 살면서 나는 위치도 괜찮은 프라이부르크를 한국 사람들은 유럽 여행을 하며 오지 않는가 싶었는데, 스트라스부르를 보고 나니 이해가 갔다. 여행객들이 원하는 건 저런 유형의 아름다움인데 독일의 이곳은 이를 충족시키지는 못하니까. 스트라스부르를 보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프랑스식 혹은 알자스식의 요리도 이곳 독일보다는 다채롭다는 점도 인상 깊었다. 똑같은 거리를 봐도, 먹거리도 그렇고, 그곳이 미학적으로는 훌륭하다고 느낀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그나저나 프랑스 약국은 독일 약국보다 퀄리티가 훨씬 좋은데 어쩌면 독일이 원가 절감을 위해 대량 생산과 최적화에만 집중하다 보니 품질이 떨어지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을 잠시 했다. 독일에 살면서 독일인, 그리고 이태리인들과 훨씬 더 많이 교류하며 무의식적으로 프랑스를 싫어하거나 깔보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들의 저력이 아직 분명히 있다는 점도 상기하게 됐다. 지척에 있는 만큼 앞으로 기회가 되면 더욱더 많은 곳을 방문해보기로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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