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몇 이들은 본인이 뼈대 있는 가문 출신이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조선 후기의 양반 비율이 절반보다 훨씬 많았다는 통계를 생각하며 흔히 족보라고 따지는 것 자체가 의미 없다는 걸 첫 번째로 생각한다. 속된 말로 조상이 상놈이었는지, 진짜 뼈대 있는 가문이었는지는 모를 노릇. 한편, 그것과는 별개로 이 자체를 긍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는데, 이는 그렇게 뼈대 있는 가문이었으면 사실 망국에 대한 책임이 더 커야 하는 것 아니겠냐는 생각과 이에 더해 지금까지 그 가문의 명맥을 지키고 있는 건 나라를 빼앗겼을 때 최소한 지식인의 책무를 다하지 않았던지 적극적인 친일 부역을 하지 않았겠냐는 게 나의 짧은 소견이다.
그런 이유로 안동이 대한민국 정신의 수도이고, 그 정신이 선비 정신, 유교라면 꼭 긍정적인지는 모르겠다고 짧게 생각했었다.
안동 하회마을은 풍산 류씨의 집성촌이다. 아마도 다른 가문도 있었는데, 풍산 류씨 가문의 세력이 커지며 그들의 토지 점유가 확장되어 지금에 이르렀다고 추측된다. 풍산 류씨 중 제일 유명한 인물은 서애 류성룡.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이자 충무공 이순신을 적극적으로 보직에 천거한 인물이다. 임진왜란이 끝나고는 이를 회고하는 징비록을 쓰기도 했다. 징비록 중 징비(懲毖)란 시경(詩經)에 나오는 ‘내가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予其懲而毖後患].’는 구절에서 따온 말이다. 특정 인물만을 지극히 높게 평가하는 ‘성웅 신화’를 조심하라는 역사 전공 교수님의 말이 떠오르지만, 짧은 식견으로는 조선왕조 오백년사 그보다 훌륭한 인물을 찾기도 쉽지 않다는 게 나의 결론이다.
먼저 그분의 흔적이 듬뿍 남아 있는 병산서원을 찾아가본다. 탁 트인 낙동강 뷰에 이를 둘러싼 산까지 배산임수가 따로 없는 명당 중의 명당이다. 흥선 대원군이 조선 후기에 ‘적폐’가 된 서원을 대부분 철폐했음에도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서원으로, 안동 북부에 있는 도산서원 못지않게 운치 있고 아름답다.
다음으로는 하회마을의 전경을 보기 위해 부용대를 보고 내려오는데, 바로 아래 고택에 하룻밤을 머물기로 했다. 알고 보니 이곳도 서애 선생의 후손이 지은 곳이라고. 다음날 일어나 5분 정도 걸어가니 그곳은 서애 선생이 징비록을 썼던 장소이기도 했다. 지금은 숙박도 가능하다. 가격은 다소 사악하지만.
그렇게 하회마을을 쭉 둘러보고 안동을 떠난다. 안동찜닭이나 간고등어가 유명하다고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사실 다른 곳에 비해 먹거리가 훌륭한 편은 아니다 (안동 출신에게는 정말 송구스럽다). 하지만 만약 우리 정신의 수도가 서애 선생의 정신이라면 그것만큼은 지키고 본받아야 할 가치임에는 분명하다고 느끼는 바다.
그곳에서 본 글귀 중 인상 깊은 부분을 남겨본다. 앞으로 공부해야 하는 방향, 그 뜻과 철학에 대해 깊이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학사위주(學思爲主)
“배움은 생각을 위주로 해야 한다.” 중용에서 학문의 단계를 ‘박학, 심문, 신사, 명변, 독행’이라 하면서 신사를 가운데 둔 것과 “성현이 생각을 위주로 하여 학문을 하였듯이, 단순히 입으로 외는 공부가 아니라 정성을 다해서 마음의 밭을 갈고 다스린다면, 하늘의 이치가 절로 밝아질 것이다.”라고 한 것은 모두 학문에는 생각을 신중하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