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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책과 생각

위대한 영국인, 앞으로의 영국

처칠의 2차 세계대전을 읽고.

by 송다니엘

15년도에 영국 포츠머스 항에 입항했던 것을 기억해본다. 외출 때 2시간 남짓의 거리인 런던을 가는데 기차요금은 수십만원, 버스는 만 오천원 정도. 가격 때문에 버스를 탔고, 교통체증에 예정시간보다 두 배 이상의 시간이 걸렸던 걸 떠올려본다. 공공 서비스에 대한 합리적인 가격을 기대하기는 어렵고, 살인적인 물가로 살기 어려운 런던. 브렉시트의 여부가 결정되지 않은 혼란스러운 정치 등. 한 때 세계를 이끌던 영광스러운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지리멸렬한 모습이다.


영화 러브 액츄얼리 속 영국 수상이었던 휴 그랜트는 미국 대통령과의 굴욕적인 협상을 뒤엎고, 정치인의 길이 아닌 영국인의 길을 선택했다. "영국은 작지만 위대한 나라입니다. 셰익스피어, 처칠, 비틀즈, 숀 코네리, 그리고 해리포터의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위대한 영국인’ 윈스턴 처칠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비교적 최근 개봉한 영화 다키스트 아워, 덩케르크, 킹스 스피치 등을 통해 어렴풋이 그 당시 상황과 그에 대해 미루어 짐작 해 볼뿐이다.


그가 이 책을 바탕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사실은 듣는 사람에게 의외일 것이라 추측해본다.

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의 약 20년, 2차 세계대전 수상으로서 5년 간 처칠의 인내 과정을 1400여 페이지의 책으로 녹여놓았는데, 그 책을 넘기며 나도 인내했다. 한편 우리나라 제일 큰 서점에도 없는 책이 도서관에 있다는 사실에 감사함을 느꼈다.

1차 세계대전의 종전, 이후 여러 혼란을 거쳐 평화의 물결 속에 파시즘, 나치가 등장했다. 당시 유럽(처칠의 관점에서 영국과 프랑스)은 그 평화를 깨트리고 싶지 않았고, 스스로 파시즘을 억제할 수 있는 수많은 기회를 놓쳤다.

“어느 날 루스벨트 대통령이 나에게 그 전쟁을 어떻게 부를 수 있겠느냐고 공개적으로 의견을 묻고 있는 중이라고 한 적이 있다. 나는 즉시 불필요한 전쟁(the Unnecessary War)"이라고 대답했다. 그 전의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 세상에 남은 것마저 완전히 파괴해버린 이번 전쟁만큼 방지하기 쉬웠던 전쟁도 없었다.”

독일이 베르사유 조약을 위배하고 비무장지대(라인란트)에 병력을 배치하고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할 때 두 강국은 수수방관하고 평화협정에만 목맸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해서야 선전포고한 영국은 늦었지만, 그 이후부터 종전까지 그 의무를 다했다. 이후,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고, 이탈리아가 독일과 손을 잡을 때만 하더라도 독일이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밖에 없지 않았나 느껴지기도 한다.

“전쟁이란 대체로 대 실수의 목록이다.”
“우리는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우리의 허약함은 우리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다. 유럽 전체의 안정과 관련되어 있다.”
“Success is not final, failure is not fatal. It is the courage to continue that counts.”

이 순간부터 해군력의 중요성이 대두된다. 생도 시절, 해전사 수업 등을 통해 귀에 딱지가 듣도록 들은 마한의 “해양력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을 떠올렸다.

“영국에서는 우리의 결점이 어떤 것이든 바다와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철저히 이해하고 있었다. 수세기 동안, 우리 핏속에 흐르고 있는 기질이었으며, 그러한 전통은 전체 국민을 약동시켰다. 영국의 힘은 물론 섬나라의 저항력과 해군 군사력의 오랫동안 인내할 수 있는 저력을 이해하는 데에서 나왔다.”

이후, 종전까지 유보트에 의한 위협에 시달리고, 비시 정부의 프랑스 함대를 침몰시킬 수밖에 없었으나 바다에서부터 주도권을 가져온 영국은 미국과 소련의 동맹을 이끌어 낸다. 그로부터 전황은 바뀌어 북아프리카에서 롬멜군을 격퇴하고, 동부 전선에서는 스탈린그라드를 지켜 전쟁의 주도권을 가져온다. 그 이후, 전쟁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비롯한 서부전선에서의 승리와 소련의 진군으로 연합국의 승리로 막을 내리는데 승리와 동시에 비극이 생긴다.

“독일 군사력의 궤멸과 함께 공산주의 러시아와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 사이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양자는 그들 사이에 끈이었던 공통의 적을 상실한 것이다. 영국은 단독으로 결정적인 행동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 단계에서 나는 경고와 변명 외에는 할 수 없었다.”


“수많은 폭풍우를 이겨냈던 우리의 힘도 빛나는 햇빛 속에서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승리한 민주주의 군대는 곧 흩어져 버리고 참으로 힘든 시련이 우리 앞에 놓일 것이라는 두려움을 떨쳐낼 수 없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이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총성이 멈춘 뒤, 세계가 재편되는 모습에 사람들은 환멸을 느꼈다. 우리도 그 피해자 중 하나이다. 전후 세계는 그가 희망하던 대로 구축되지 않았다. 실제로 그가 수상 직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바라던 세계가 21세기를 앞두고 이뤄지지 않았나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대원칙은 각 나라의 국민이 원하는 바에 따라 그 나라의 정부 형태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가 이렇게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이다. 21세기를 앞두고 소련이 해체되었으며 독일이 통일을 이루고 중국이 힘을 발휘하기 시작함으로써 새로운 변화의 시대로 접어들었지만 그마저 지난 세계대전이 만들어놓은 결과에 이은 현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은 오늘의 우리를 이해하는 하나의 창구인 셈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상생과 평화의 길에서 다시 길을 잃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곳곳에 혐오가 넘치고, 이를 이용하는 세력이 정말 많다. 결국 같은 혼란이 다시 전쟁과 같은 극단적인 수단으로서 표출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이에 역자는 역사가 주는 교훈으로 성공한 사례가 없다는 것이 어리석은 인류 정치의 역사라고 꼬집는다. 이는 역사의 해석이고, 저마다 다른 해석을 하는 능력을 발휘하는 존재가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해석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 실마리, 지혜를 가져야겠다.


“우리 모두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면 지금의 우리를 바로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처칠은 개전 초기부터 그는 막중한 책임감을 가지고 이를 수행했다. 전쟁 중 그는 여러 연설을 통해서, 수많은 편지를 통해서, 그리고 수많은 작전에 기여했다. 지상 최대의 작전을 불리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 이용된 상륙함(LST)은 1차 세계대전부터 구상해오던 처칠의 아이디어에서 실현된 것 중 하나였다.

각설, 그의 책임감에 대해서 다시 곱씹어본다.


“머지않아 무너져 버릴 거짓 희망을 내세우는 것 이상으로 공공의 리더십에서 나쁜 과오는 없다.”


“책임이 있는 사람은 아무리 동기가 훌륭했다고 하더라도 역사 앞에서 비난을 면할 수 없다.”


“말은 아무것도 보장하지 못한다. 의혹은 오직 행동에 의해서만 제거될 수 있다.“


“무슨 일을 실행하기 전에 모든 것에 대해 모든 사람들과 협의해야 한다면 행동은 마비되고 말 것이다.”


“전쟁이나 위기를 맞아 사태 처리의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을 선량한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는 광범위한 일반 원칙의 설명에 옭아매려고 하는 시도는 허용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매일 단호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리고 견고자세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어떠한 공동행위의 결속도 지속시키기 어렵다.”


사진은 15년도 런던에 갔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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