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인류의 미래에 있어 제일 중요한, 난제
“역사는 되풀이되지 않는다. 하지만 종종 어떤 사건은 의미심장하게 재현되곤 한다.”
이 책을 산 게 처음 독일로 갈 때였으니, 거의 2년 반을 사놓고 묵혀놨다. 중간중간 읽으려고 했지만, 내겐 당면한 일이 너무 많았고, 그 일을 마무리하고서는 이런 무거운 책을 읽을 힘이 없었던 듯하다. 내겐 이 책을 읽고 싶은 동기부여가 있었는데, 이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에서부터였다. 당시 서방 세계가 반응하는 모습을 보고, 이 ‘자유진영’의 뿌리는 무엇인지 그 근원에 대해 더 호기심이 생겼던 듯하다.
Part I. 자유주의 신념의 성장과 유럽에서의 자유주의
먼저 저자는 이 자유주의라는 이념 자체가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서술한다. 사실 전쟁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의 첫 모습, 자유주의의 뿌리는 근대적 국가라는 개념이 탄생하기 이전, 16세기가 시작될 무렵 로테르담의 에라스뮈스로부터 시작된다.
“전쟁은 자연스럽지도 이성적이지도 않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기독교 세계를 지키고 그 영토 안에서 하느님의 정의를 보전하기 위해 기독교 기사들은 정당히 폭력을 휘두를 수 있다는 중세의 이념은 이제 사실상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이로부터 두 세기 동안 전쟁과 평화에 대한 자유주의 사고를 지배할 주장은 다음과 같다.
“전쟁은 국가들 사이의 잘못된 인식과 전사 계급의 지배로 초래된 것이다. 이 두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자유 무역에 있었다.”
이와 같은 사고가 18세기 계몽주의 철학자들의 사상의 근원이 되고 이는 프랑스 혁명의 뿌리가 된다. 몽테스키외, 칸트와 함께 페인은 희망이 공화정 제도에 있다고 굳게 믿었다. 프랑스 혁명 이후, 페인이 쓴 글이다.
“정부 문제와 관련해 한 번도 없었던 이성의 아침이 인류의 머리 위로 떠오르고 있다. 이전의 정부는 오늘날 야만이 되어 사라질 것이며, 국가들 사이의 도덕적인 조건도 바뀔 것이다. 인류는 이제 자신의 동족을 적으로 간주하는 원시적인 사고에 따라 살아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의 아이러니라면 이런 아이러니가 있을 수 있을까.
“이 글이 출판된 지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프랑스와 이웃 국가들은 역사상 유례없는 강렬한 적의를 일으키며 25년 동안 맹렬히 계속된 전쟁에 휘말렸다. 프랑스 대혁명에 의해 어떠한 종류의 아침이 밝게 되었든 그것은 분명 이성의 아침은 아니었다. 당연히 평화의 아침도 아니었다.”
즉, 공화정 제도에선 전쟁이 없을 것이라는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의 희망은 역사적으로 틀렸음이 증명됐다. 다만 이처럼 역사적으로 틀렸다고 증명된 사상이 어찌 지금까지 남아있을 수 있게 됐을까.
“이 같은 신념이 19세기 내내 유럽을 들끓게 했던 ’민족 해방‘을 위한 투쟁만 아니라 20세기 천인공노할 인종대학살을 겪으면서도 (...)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변화와 적응의 과정을 통해서였다.”
이 변화와 적응의 과정으로, 19세기 자유주의의 모습엔 다음과 같은 전제가 붙는다.
“국가 사이의 평화는 모든 국가가 자유로이 존재할 때에만 가능했다.”
여기서 프랑스와 독일의 근본적인 정체성 차이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19세기 중반, 엄청난 여세를 몰아치던 ’평화 운동‘은 마찬가지로 대등한 힘을 결집한 호전적인 민족주의와 정면으로 부딪히게 된다. (...) 처음으로 수백만에 달하는 이들이 전쟁이 끔찍하기는 하지만 필요할 뿐만 아니라 장엄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은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싸울 이유를 국민(nation)이라는 개념에서 찾았다. (...) 프랑스인들에게 군대는 곧 국민이었으며, 국민은 전쟁을 통해 탄생했다.”
“독일의 자유주의자들은 오히려 자신들을 다스리고 있는 왕가에게 자신들이 선두에 설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독일의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는 독립된 국가 간 단순한 동맹이 아니라 통일된 독일 국가의 기치 아래 싸운 전쟁에서 승리한 1871년 1월 프로이센 국왕이 베르사유 궁에서 독일 황제로 등극하는 순간 최고조에 달했다.”
즉 봉건제도의 핵심인 왕권을 직접 폐지한 프랑스의 민족주의와 민족주의의 선두로 왕권을 내세운 독일의 모습에선 우린 근본적인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어떤 역사학자는 프랑스 대혁명보다도 도이치 민족의 통일이 훨씬 더 큰 혁명이었다는 견해에, 유럽 내 파급력은 더 클 수 있다는 점에 있어 일견 동의한다.
이처럼 19세기 민족주의의 광풍은 궁극적으로 결국 모든 민족이 본인들만을 위한 국가를 비로소 만들었을 때에야 평화를 쟁취할 수 있다는 점을 우린 알 수 있다.
“적어도 유럽 대륙에서는 평화가 정당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해야만 하는 전쟁을 더 치러야만 도래할 것이라고 믿는 이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었다.”
그렇게 우린 제1차 세계대전을 목도하게 된다.
“만약 전쟁이 발발한다면 이는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간 갈등의 결과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자유주의자들에게 이 새로운 국민전(war of nations)은 실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1914년 자유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은 전쟁을 열망하는 자본가 계급이 평화를 갈구하는 강력한 세력으로 탈바꿈했다는 최면에 걸려 진정한 위험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즉, 이들은 자신들이 오랫동안 비난해 마지 않았던, 세력 균형에 기초한 국가 간 체계에 내재되어 있는 힘에 따른 위험과 자신들이 북돋웠던 군사적 민족주의라는 새로운 힘에 따른 위험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 둘이 결합되어 자유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세우고자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초국가적 공동체를 재건할 희망조차 품지 못하도록 완전히 초토화시켜 놓았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 이후, 평화의 항구적인 구축을 위해 구상되었던 집단안보 체제는 1930년대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아비시니아 사태)을 통해 그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아비시니아 사태를 보면서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보았던 두 가지 개념, 즉 집단 안보와 세력 균형이 정면으로 부딪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말로 사려 깊은 여론의 지지를 받은 것은 전자였으나, 결국 지배적인 것은 후자였다. 하지만 이제 전쟁을 해야만 한다고 조언한 측은 자유주의 양심의 목소리인 전자였다. 반대로 평화를 지키기 위해 대내외적으로 온갖 굴욕을 참아낸 측은 정부와 관료 그리고 혐오스러운 ’기성 권력 기구‘의 목소리인 후자였다. ”
노먼 에인절은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세계의 발칸화를 초래할 민족주의가 아니라 국제주의다.”라고 결론지었다. 전쟁에 대한 해결책은 자각과 교육 그리고 국제 제도의 구비에 있었다. 바로 이와 같은 생각이 양차 세계 대전 사이에 자유주의 사고의 주류를 인도했으며, 모든 집단 안보 개념의 초석이 되었다.“
1939년 히틀러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이후, 에인절은 또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나 자신을 비롯한 거의 대부분 자유주의자에게 세력 균형은 정말로 악취가 풍기는 개념이자 정책이었다. (...) 하지만 우리는 곧 강권 정치가 다른 국가에 압도당하지 않으려는 정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는 또다시 전통적인 자유주의의 역설을 또 목도한다.
“이렇게 해서 자유주의 양심은 또다시 국가 간 분쟁을 정당한 전쟁으로 여기게 되었다. ”
저자는 이때까지의 자유주의를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민주적인 사회의 평화를 사랑하는 특성에 관한 모든 환상을 깨뜨렸을 수도 있다. 허나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비민주적인 사회 – 빌헬름 독일과 나치 독일과 더불어 일본 제국주의의 군국주의 – 의 호전적인 본질을 낱낱이 보여주는 증거를 통해 민주적인 제도의 보편화가 세계 평화를 위한 충분조건은 아닐지라도 필요조건은 된다는 점을 일깨어주었다. 바꿔 말해, 새로운 세계 질서의 목표는 민주적인 정부의 확산에 있었다. 평화와 민주주의는 상호의존적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통해 자유주의자는 다시금 “앞서 일어났던 모든 전쟁의 경우에서와는 달리 군비 경쟁에 의해 과열되고 세력 균형에 의해서만 억제되는 주권 국가의 무정부체제로 회귀하는 일은 이제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Part II. 자유주의의 이상 국가 미국.
이제 주인공은 미국이 된다. 조금 인용문이 다소 길긴 하지만, 다음의 글을 살펴보자.
“사실 지구상 수많은 국가 중 유독 미국만이 인종적 공동체나 역사적 경험의 공유가 아니라 가치 체계에 대한 전념에서 자국의 정체성을 찾았으며, 이는 현재에도 어느 정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달리 말해, 즉 자유주의 교리에 대한 끊임없는 지지와 헌신은 미국 사회를 통합시킨 근본 요소 중 하나였던 것이다.”
“부와 힘을 득하자 자신의 복음을 전도하고 그에 비추어 세계를 변혁하고자 속세에 뛰어들었던 퀘이커교파처럼 미국 역시 부와 힘을 취득하자 국제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 미국도 자신의 형상에 따라 국제 정치를 완전히 재편할 수 있을 때에만 양심에 비추어 일말의 부끄러움 없이 지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다음은 영국이 1947년, 재정부담으로 세계의 경찰국가 노릇을 그만둘 때 관한 서술이다.
“미국이 몰락하는 영국 제국을 구해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고 애초부터 의심해왔던 하원에 이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공화당 지도부는 미국의 여론이 납득할 만한 수준에서 설명될 때에만, 즉 자유주의 양심에 비추어서 타당할 때에만 지중해 지역에 대한 개입을 지지할 것이라는 점을 정부에 분명히 전달했다. 이에 트루먼 대통령은 앞서 유럽의 정치인들이 미심쩍지만 피할 도리 없는 조치로 여겼던 세력 균형의 전통적인 체제 내에서 지역적 연루를 어떻게든 어둠의 세력에 맞선 마니교적인 대결을 위한 군사조치로 바꿔서 설명했다.”
다음은 1947년 3월 발표된, 그 유명한 트루먼 독트린이다.
”자유를 위해 싸우고 있는 전세계의 자유민들이 도와달라고 우리에게 애타게 호소하고 있다. 혹시라도 우리가 이들을 제대로 지도하지 못한다면 세계 평화가 위태로울 것이다.“
”이제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어디에 서 있는지 알았다. 미국인들은 10여년 전 유럽에서 처음 터졌을 때에는 너무나도 불행히도 회피했던 민주주의 세력과 전체주의 세력의 대립, 자유세력과 독재세력의 대립에 최전선에 서 있었다. 미국인들은 지난 실수를 반복하지는 않으리라 다짐했다. 미국인들은 또한 적을 달래기만 하는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리라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이렇게 사상에 있어선 이미 세계의 경찰국가가 다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이 모든 패러다임을 바꾼 게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이다.
“제 아무리 고귀한 의도를 품고 있었다 할지라도 1950년 6월 이전 미국인들이 세계 패권으로서 희생을 무릅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증거는 찾아보기 힘들다. 한국이 이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하룻밤 사이에 방위비가 네 배로 뛰었으며 계속 치솟았다. 하원의 공화당 의원들은 방위비가 너무 많다가 아니라 왜 더 많이 또 왜 더 일찍 요청하지 않았냐고 행정부를 다그쳤다. (...) 이 전쟁이 진실로 정의로운 전쟁이라면 이 전쟁은 절대 협상이 있어서는 안 될, 오직 승리만 있을 뿐인 십자군 전쟁이었다.”
“트루먼 행정부와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상당수는 자신들의 선언적인 정책이 과장된 수사라는 점을 인정했다. 하지만 현실 정치의 극도로 제한된 상황에서 일지라도 소련의 힘을 되받아치고 가두어두려면 미국 스스로 힘을 키워야만 했다. 만약 여론의 제약으로 인한 무기력이나 핵무기에 의한 과잉 살육이라는 두 가지 대안만 주어진다면 이들은 주저 없이 후자를 택할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대규모 군비 경쟁이 불붙었다.”
그리고 이 공산주의와의 전쟁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베트남은 자유세계를 집어삼키려는 공산주의라는 홍수를 막고 있는 제방의 구멍으로 묘사되었다. (...) 이와 같은 인식이 함의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상대는 비인간화되었다. 상대는 더 이상 나름의 공포와 인식, 이해관계와 문제를 지닌, 따라서 합리적인 토론이나 타협이 가능한 대상이 아니었다. 둘째로, 미국의 이익이 일치되는 모든 국가와 정부는 이들의 정치 체제의 성격과 관계없이 명예 민주주의 사회로 자동적으로 ‘자유 세계’의 일원이 되었다... ‘자유’는 이제 미국의 영향권 아래에 있는가 또 미국이 시키는 대로 행동할 의사가 있는가의 문제로 전락했다. 끝으로, 미국의 동맹을 괴롭히는 세력은 모두 모스크바의 사주를 받고 있다고 여겨졌다.”
그리고 이 베트남 전쟁은 자유주의 이상국가였던 미국의 신념, 그 도덕성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고 그들 스스로 의문을 품게 했다.
“민주주의와 평화 가치의 화신인 미국이 건국된 지 200여 년만에 자유를 위해 싸우고 있는 소수 민족을 탄압하는 잔악무도한 전쟁을 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등골 오싹한 의문이 미국의 자유주의자 사이에서 번져갔다.”
그리고 이 모든 신념으로부터 벌어진 참사를 구해준 건 안타깝게도, 그들이 제일 경멸하는 현실주의적인 ‘세력 균형’ 이론이었다. 이를 대표하는 이는 얼마 전 세상을 떠난 헨리 키신저다.
“유럽 출생으로 메테르니히의 숭배자였던 헨리 키신저 박사가 미국을 이와 같은 곤경에서 구출하는 과정을 깊이 다루는 것은 이 책의 주제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된다. 키신저 박사의 이름은 곧 강권 정치와 비밀 외교를 위시한, 미국의 자유주의자들의 영원히 뒤로 하고자 소망했던 국제적인 책략의 모든 기제를 뜻하는 단어가 되었다.”
Part III. 역사로부터의 함의, 자유주의의 역할.
미래를 다루기 전에 먼저 그간 있었던 역사를 간략하게 요약해보자.
“민주주의로의 이행은 결코 전쟁을 없애지 못했다.”
“국제주의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우선 국가가 탄생되어야 한다. 하지만 문화적인 자기의식과 정치적인 독립을 일궈낸 민족은 아직 이를 일궈내지 못한 민족의 요구를 너무나 쉽게 잊곤 한다.”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무력의 사용은 지지하지만 이외에 다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무력의 사용은 반대할 수도 있는 것이다.”
역사가 긴 전통적인 유럽 국가에서 제아무리 자유주의 사상이 탄생했다고 한들, 태생적으로 그들은 세력균형과 같은 현실적인 입장을 항상 고려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이건 미국의 경우와는 다르다. 애초에 그 어떤 나라보다도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미국인들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모든 전쟁에 있어 그들이 옳다는 걸 신앙처럼 생각했고, 이와 같은 미국의 ‘십자군’은 제2차 세계대전부터 한반도에, 그리고 베트남에도 전력을 투사하기에 이르렀다. 우리 입장으로서는 미국이 6.25전쟁에 참전했기에 공산화를 막을 수 있었지만, 베트남은 사정이 달랐다. 이처럼 자유주의 사상은 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며 너무나도 많은 폐단을 낳았고, 이는 베트남에 그치지 않고 이후의 라틴아메리카, 중동에서의 수많은 문제를 낳았다. 정말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아직도 그들을 십자군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 자유주의 사상에 제일 강하게 맞서는 것이 자유주의자들이 그토록 경멸하는 강권 정치, 세력 균형의 개념이다. 사실 현대의 국제정치의 메커니즘은 이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미국, 아니 유럽연합이 자유를 울부짖는다고 러시아가, 중국이, 아니 다른 기타 중동, 라틴아메리카 국가가 콧방귀라도 뀌는가. 이런 현실적인 생각을 나보다 먼저 했던 이가 헨리 키신저이고, 그가 줄기차게 노력했던 덕택에 미국과 중국은 베트남 전쟁에서의 국면을 전환하고 중국과의 데탕트를 이뤄낼 수 있었다.
2024년 현재 지금의 국제 정세는 더이상 자유주의가 이전과 같이 신성하게 우뚝 설 자리가 없다. 어쩌면 유럽연합의 수장인 우르줄라가 줄기차게 그와 같은 가치를 떠드는 건 허망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유럽은 힘이 없고, 바이든의 미국도 동맹 관계를 회복하겠다고 선언했으나 예전과 같은 패권과 신뢰를 잃었고, 이런 배경 속에 트럼피즘이 대두하는 건 어쩌면 지금의 시대상인지도 모르겠다. 트럼프의 결함이 너무나도 많더라도 그게 지금의 미국의, 아니 세계의 자화상이 아니겠는가. 미국은 이제 전과 같은 신앙과 이상으로 똘똘 뭉친 ‘자유주의 이상국가’에서 고립주의로 선회할 것이다. 이건 트럼프가 아니어도 그렇게 될 듯하다.
그렇다면 작금의 시대는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그것까지는 감히 알 수가 없다. 꽤 많은 소용돌이, 분쟁이 있을 것이고 이에 따라 많은 힘 없는 이들이 고통받을 것은 분명하다. 기후변화라는 게 내겐 제일 중대한 문제라고 믿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를 국제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실천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게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전망이다.
이에 대한 전망 내지는 희망으로, 저자는 1986년 서문에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영구 평화를 위한 칸트의 처방 중 하나인 ”모든 국가의 헌법 체제는 공화정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타당성을 입증했다. 지난 두세기 동안 다원적인 민주 정체는 서로 싸운 적이 거의 없으며, 앞으로도 싸울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고 장담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 소위 ’서구‘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이 같은 민주주의 국가를 소련은 위협과 적대로, 대부분 제3세계 국가는 분노와 적의로 대하고 있다. (...) 평화를 사랑하고,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점점 더 국가를 넘나드는 자유 민주주의 공동체가 자신의 궁극적인 이상을 실현키 위해 군사력의 사용을 포기하면서도 자신의 이익을 보전하는 동시에 영향력을 증대할 수 있을까?”
이어서 저자는 2008년 개정된 서문에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역사는 되풀이되지 않는다. 하지만 종종 어떤 사건은 의미심장하게 재현되곤 한다. 이 책에서 ‘자유주의 양심(liberal conscience)’의 화신인 글래드스턴이 1882년 영국의 이집트 침공을 정당화하고자 제시했던 다음의 말을 되풀이해 마주할 것이다.”
“무정부와 갈등으로 점철된 현재 이집트의 국내 상황을 평화와 질서의 상태로 완전히 바꿔놓지 않는 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를 다한 것이 아니다. 남은 시간 우리는 문명화된 유럽 열강의 협력을 기대해야 할 것이다. 허나 협력을 이끌어낼 기회를 모두 소진했다 할지라도 영국은 이 일을 혼자서라도 끝까지 책임져야 할 것이다.”
“그랬다. 이집트 전쟁은 짧았고 희생도 비교적 적었다. 그러나 이집트를 “무정부와 갈등으로부터 평화와 질서의 상태”로 바꿔놓기 위해 영국은 이집트에 70년 넘게(1882~1956) 더 주둔해야만 했다. 애석하게도 변한 것은 별로 없는 듯싶다. 자유주의 양심의 열망이든 아니면 그것의 의도치 않은 결과든.”
다소 희망적이었던 1986년 서문보다 비관적인 2008년 서문, 아마 그가 오늘날 다시 서문을 작성하게 된다면 더 비관적이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한다.
다시 생각해본다. 이 자유주의가 나쁘냐. 아니면 효용이 없느냐. 그래도 이 자유주의 덕분에 우리가 살았고, 지극히 개인적으로 필자는 이 독일 땅을 밟고 있는 것이라고 믿는다. 다만, 이 긴 글의 주인공이었던 미국, 영국, 러시아뿐만 아니라 수많은 국가가 길을 잃은 것처럼 보이고, 한반도의 미래는 이처럼 각국이 끊임없이 충돌하는 국제정치의 배경 속에 제일 취약하기에 더욱 비관적인 전망을 하지 않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또한 1986년 저자가 서술한 것처럼 다소 희망 섞인 전망을 유지하고 싶다.
부록.
수많은 위대한 인물, 사상가가 언급되는데, 당대의 제일 현명한 지식인이었다고 하더라도 미래에 대한 제대로 된 예측을 한 이는 거의 없다는 점을 눈여겨볼 만하다. 이처럼 시대에 따라 사상은 변한다. 이전까지는 봉건 사회가 붕괴되고 더 나은 사회인 민주주의 사회로 진입하게 되면 전쟁이 자연스럽게 소멸될 거라는 예측이 보기 좋게 빗나가고 전쟁의 양상은 더욱 과격하고 파괴적으로 변했다. 이전까지는 귀족 계급 간의 갈등에서 끝났다면, 이것이 이제는 만인들의 전쟁이 되어버린 셈이다.
한때 자본주의의 구조적인 문제점을 언급하며, 맑시즘에 심취해 있던 누군가는 이 사회의 근본적인 해결이 자본주의 시스템의 혁파로부터 가능하다고 내게 강하게, 어쩌면 주입식으로 이야기하곤 했는데, 모든 사회의 문제가 그리 간단하거나 명확한 인과관계가 있지 않다는 걸 나 스스로 새삼 깨닫게 된 것처럼 전쟁 또한 그러하다. 자유주의의 사상이 널리 퍼지면 국가간의 충돌이 없어질 것이라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 모든 게 제국주의자들과 자본가 세력의 결합, 그들의 탐욕이 근원이 있다고 했지만 그런 이론은 현대의 역사학자로부터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만약 1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자본가 간 경쟁의 심화와 이들의 시장 확보 노력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역사학자와 정치학자가 있다면 이들은 마치 시계를 잃어버린 곳이 아니라 불빛이 있어 앞이 잘 보이는 가로등 밑에서 잃어버린 시계를 찾는 술주정뱅이와 흡사하다고 하겠다.”
자유주의 사상도 시대를 거쳐 많이 변화하는데, 근본적으로는 비폭력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그들이 누구보다도 양차 세계대전에 국가라는 개념을 지키겠다고 나섰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1914년 유럽 각국의 자유주의자 대다수는 어떠한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고 출정했다. 이들 중 일부는 민족의 권리를 주장하고 수호하기 위해 싸웠다. 반면 다른 일부는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고향 땅을 지키기 싸웠다. (...) 누구도 이들을 비난할 수 없었다.”
파시즘을 막겠다고, 악한 이들을 벌하겠다는 일념 아래로 스페인 내전에 참여했던 이들은 또 어떠한가. 순수한 열정으로 전쟁에 참여했던 이들이 파시즘과 기존 권력에 결국 굴복하고, 후엔 오합지졸이 되어 패했던 역사는 안타깝기도 하다.
자유주의자들은 시대에 따라 다른 모습을 취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최초의 자유주의는 어디까지나 서구였고, 그들은 때로 발칸 반도, 중동 문제에 있어 다른 모습을 취한다. 독재 권력으로부터의 해방을 돕겠다는 명목으로 이집트에 개입한 영국은 시간이 지나며 해결되지 않는 문제에 있어 무한한 재정을 투입하는 데 부담을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이것이 결정적으로 2차세계대전 이후 영국이 이런 문제로부터 손을 떼는 결과로 이어졌고, 이런 역할을 미국이 떠맡게 됐다.
“1947년 2월 종전 후 들이닥친 첫 번째 대규모 경제 위기에 직면해 영국 정부는 지중해 지역에서의 대치 관계를 유지하는 데 너무나 많은 비용이 소모된다고 판단했다. 결국 영국 정부는 러시아에 맞선 그리스와 터키 정부에 대한 원조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영국은 100여년 전 개시되었던 러시아에 맞선 지중해 지역에서의 ‘거대한 게임(Great Game)’을 포기해야 했다. (...) 역사가들은 영국 정부의 이 같은 결정이 미국 정부로 하여금 유럽의 강권 정치의 장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놓도록 만들었다는 점에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마지막으로, 개인적으론 수많은 사상가와 정치가보다도 이 모든 일을 실천으로 옮겼던 이들에 마음이 끌린다. 이탈리아 독립을 위해, 유럽과 남미 등지에서 목숨을 바쳐 해방 운동을 펼쳤던 가리발디와 같은 인물로부터 말이다. 뜻을 품고 실제로 실행하는 이에 대한 존경심이라고나 할까. 뭐 그 이상이 올바르지 못하다면 문제가 있겠지만.
참고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통념과는 다른 이야기가 또 하나 있다.
“전쟁을 치르는 동안 워싱턴은 소련이 전쟁이 끝난 뒤 엄청난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큰 나라라고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당수 미국의 자유주의자는 새로운 세계 질서의 건설을 방해하는 나라로 영국을 지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