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우스트. 20대 초반, 다소 와닿지 않는 소재와 문체 때문에 몇 페이지를 훑어보다 덮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즐겁게 읽었으나 이 작품이 왜 그렇게 위대한지 전혀 와닿지 않았다. 그렇게 10년이 지나 이 책을 완독했다. 이탈리아 기행을 두 번 완독했고, 그의 삶을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나름대로 따라가 보았기에 파우스트를 더 이해할 수 있었다.
파우스트의 소재는 지금도 많은 예술작품에 인용된다. 나로서는 악마와 거래한 인간에 관한 이야기. 그냥 그 정도로만 10년 정도 알고 지낸 듯하다. 왜 악마와 거래를 하게 됐는지, 그리고 그 끝은 어떠했는지까지는 관심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다. 계속 와닿지 않았던 소재였던 셈이다.
독일에서 살며 온갖 동네에서 괴테의 흔적이 있다 보니 자연스레 괴테에 관한 생각이 다시금 몽글몽글 올라왔다. 또 내겐 괴테가 이탈리아로 떠나며 했던 다짐들이 새로운 삶을 열어주는 동기부여가 되기도 했으니, 그에게 관심을 계속 가지는 건 당연했다. 이탈리아 기행에도 파우스트에 대한 언급은 이어진다. 괴테 이전의 시대에도 수차례 다뤄졌던 파우스트의 소재가 그 자신에게도 흥미로웠는지 집필을 시작하지만, 끝맺지 못하고 이탈리아를 다녀온 이후로 파우스트의 첫 단편을 완성한다.
그의 고전에 대한 깊은 관심, 특히 로마나 나폴리에 그치지 않고 시칠리아까지 가서 고대 그리스의 원형을 찾으려고 했던 지적 욕구, 흥미가 이 책에 잘 담겨있다. 여기에 더해 독일의 토속 신앙이라고도 할 수 있는 마녀들이 활동한다는 발푸르기스의 밤을 비중 있게 다룬 점은 제일 ‘도이치’스러운 이야기를 유럽의 뿌리인 그리스와 결부시켰던 건 아닐까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 소재로, 끊임없이 탐구하고 노력하는 인간이, 어느 순간 유혹에 굴복하면서도, 끝내 본인의 뜻을 관철한다는 그 나름의 이상적 인간상을 보편화하려는 노력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이와 별개로 흥미로웠던 점은, 그가 묘사한 악마가 얼마 전에 신부님이 내게 설명해주었던 악마와 너무나도 유사했다는 점이었다. 악마는 과거를 알고 있고, 그것으로 인간의 약점을 들추어 유혹하는데 이 시공간을 초월하는 ‘위대한 악마’가 미래는 알 수 없고, 결국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꺾을 수 없다는 점이 내게 많은 점을 시사했다.
한편 나는 감히, 이 위대한 문학가 괴테가 다소 우습다는 생각도 해봤다. 이는 작품에서 여인의 사랑을 갈구했던 파우스트가 끝내 좌절했는데, 이 모습이 말년에 그가 좋아했던 온천도시, 카를로비 바리(카를스바트)에서 10대 소녀에게 구혼하다가 매정하게 차이고, 다시는 그곳에 돌아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떠올라서다. 그 위대한 문학가가 그렇게 나이를 먹고서도 본인의 또래도 아닌, 손녀뻘도 더 되는 여성에게 차이고서 그곳에 돌아가지 않았다는 게 한 남성으로서의 괴테는 어쩌면 ‘위대한 찌질이’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랄까. 물론, 어쩌면 이런 순수함이 그를 위대한 문학가로 만들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이유로, 몇몇 이들은 그를 위대한 문학가임과 동시에 별로 훌륭하지 않은 인간으로 평가하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삶에서 큰 뜻을 펼쳤던 위인은 아니었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런 면에서 그의 작품, 파우스트에서도 당시 유행하던 도이치 민족주의자들을 그리 좋게 평가하지 않았던 건 그의 기질인지도 모르겠다. 괴테는 본인이 재상으로 있던 바이마르를 침략한 나폴레옹과도 좋은 사이를 지낸 그가 아니었던가. 어쩌면 예술가는 그저 예술가로만 바라봐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작금의 시대에도 정치에 관여하는 문화예술인들 혹은 일제 강점기에 적극적인 친일을 했던 이들을 비춰보더라도.
각설.
청년 때부터 집필을 시작한 이 작품을 괴테는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에 마무리했다. 참, 삶을 통틀어 무언가를 완성한다는 건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베토벤, 모차르트, 모네와 같은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한편 괴테 이전의 파우스트에서 악마의 꾐에 넘어간 이의 말로는 지옥행이었는데, 그의 작품에서는 그런 악행 속에서도 끝내 노력하는 이에게 좋은 끝을 맺어주었다. 이것이 장대한 이야기로부터 작가가 우리에게 주는 제일 큰 메시지가 아닐까. 즉 방황하던 끝에 올바른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주는 희망. 그리고 이는 그리스도교의 사랑과도 결부되어 있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세례를 받거나 고해성사를 하는 듯한 느낌을 받기까지 한다.
“당치도 않은 소리! 이 지상에는 아직도
위대한 일을 할 여지가 남아 있어.
놀랄 만한 일을 해내야 해.
과감히 노력하고픈 힘이 느껴지네.”
...
“그렇다! 이 뜻을 위해 나는 모든 걸 바치겠다.
지혜의 마지막 결론은 이렇다.
자유도 생명도 날마다 싸워서 얻는 자만이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이다.”
...
“내가 세상에 남겨놓은 흔적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같이 드높은 행복을 예감하면서
지금 최고의 순간을 맛보고 있노라.”
역시 아직은 내가 젊은지, 노년의 괴테가 집필했던 2부보다는 마흔 무렵에 썼던 학문에 대한 회의와 사랑을 다룬 1부가 더 와닿는다. 특히 학문에 대한 회의에 공감하는 건 내가 지금 공부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30년 후엔 2부가 와닿을지는 모르겠다.
<부록>
“우리가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닫고 보니
내 가슴은 거의 타버릴 것만 같다.”
...
“그 대신 모든 즐거움은 사라져버리고,
무언가 올바른 것을 알았다는 자부심도 없으며,
인간을 선도하고 개선시키기 위해
그럴싸한 걸 가르칠 자신도 없구나.”
,,,
“결국 이렇게 주저앉아 있어도
내부에서 아무런 힘도 새로이 솟아나지 않는군.
털끝만큼도 높아지지 못하고,
한 걸음도 무한한 자에게 다가서지 못했네.”
...
성실한 태도로 성공의 길을 찾게나!
소리만 요란한 바보는 되지 말아야지!
이성과 올바른 마음만 가진다면
기교를 부리지 않아도 연설은 저절로 되는 법이라네.
...
자네들이 시대정신이라고 부르는 것도
따지고 보면 작가 양반들 정신 속에
그 시대가 반영된 것에 불과하다네.
그러기에 실은 딱한 일이 종종 생기곤 하지!
...
정신이 획득한 아주 훌륭한 것에도
점차 이질적인 물질이 달라붙는 법,
우리가 이 세계의 선에 도달한다 할지라도
더 나은 선을 거짓이며 착각이라고 부르는 법,
우리에게 생명을 부여해 준 아름다운 감정들도
어지러운 속세에서 마비돼 버리고 마느니.
...
오, 누구든 이 미혹의 바다에서
아직은 벗어날 수 있다고 희망하는 자, 행복하도다
알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필요로 했지만,
알고 있는 것은 사용하지 못한다.
...
어떤 옷을 입든 이 비좁은 지상의 삶에서
나는 여전히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저 놀기만 하기엔 너무 늙었고,
소망 없이 살기엔 너무 젊었다.
세상이 내게 무엇을 줄 수 있단 말인가?
부족해도 참아라! 부족해도 참아라!
이것이 영원한 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