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를 들여보기
시작하기 전에 책의 여러 군데를 인용하다 보니 글이 길어졌다. 하지만 꼭 인용하고 싶은 건 그 인용구에 지혜가 있기 때문이랄까.
헤세의 소설 중 데미안이 방황하던 소년의 내면적 성찰에 대한 글이라면, 싯다르타는 이를 너머 한 인간이 깨달음을 얻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엮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깨달음의 과정은 어땠을까.
꽤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데, 주인공인 싯다르타와 이미 깨달음의 경지를 이른 고타마를 중심으로 생각해본다. 부처님의 본명이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름 자체에 무슨 장치가 있을 거라 여겨진다.
주인공인 싯다르타는 최상위 카스트인 브라만, 바라문의 아들로 태어나 그의 아버지는 그가 본인처럼 시스템 내에서 공부하고 살아가기를 바라지만, 모든 특권을 박차고 사문, 떠돌이 승려가 되기로 마음먹는다. 아래는 떠나기로 하게 만든 그의 생각이다.
“무엇 때문에, 아무 흠잡을 데 없는 아버지가 날이면 날마다 죄업을 씻어 내어야만 하며, 날이면 날마다 스스로를 정화시키려고 애써야만 하며, 날이면 날마다 똑같은 그 일을 새삼스럽게 반복하여야만 하였을까? 아버지의 내면에는 아트만이 존재하지 않으며, 아버지의 마음 속에는 근원적인 샘물이 흐르지 않는가? 그것을, 그러니까 바로 자기 자신의 자아 속에 있는 근원적인 샘물을 찾아내어야만 하며, 바로 그것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밖의 다른 모든 것은 탐색하는 것이요, 우회하는 길이며, 길을 잃고 방황하는 데 불과하다.”
“이것이 그의 목마름이었고, 그의 고뇌였다.”
마치 부처가 출가했던 것처럼 싯다르타도 떠나는데, 몇 년간의 굶주림과 숲에서의 삶 중에 현존하는 부처, 고타마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리고 그는 직접 고타마를 만나는데, 싯다르타 본인도 고타마가 깨달음에 경지에 이른 이라고 느끼고는 있지만, 그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 만남으로 평생을 싯다르타와 같이 지낸 친구 고빈다는 고타마에게 가르침을 배우러 갔고, 싯다르타는 반면 수행의 삶을 던지고 속세로 뛰어들게 된다. 이것도 그에겐 탐구의 목적이었다. 처음에는 고결했던 그는 시간이 지나며 속세의 때로 물들어간다. 다시 그곳을 벗어났을 땐, 이미 고결했던 그전과는 너무나도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지만, 그는 다시금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뱃사공으로서 살아간다.
뱃사공으로서 노인이 된 그는 그 삶에서 깨달음을 얻는다.
“싯다르타의 내면에서는 도대체 지혜란 것이 무엇이며 자신이 오랜 세월 동안 추구해 온 목적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인식과 깨달음이 서서히 꽃피어났으며 서서히 무르익어 갔다.
그 무엇이라는 것은 바로 매 순간마다, 삶의 한 가운데에서 단일성의 사상을 생각할 수 있는, 그 단일성을 느끼고 빨아들일 수 있는 영혼의 준비상태, 그런 일을 해낼 수 있는 하나의 능력, 하나의 비밀스러운 기술에 다름 아니었다. 조화, 세계의 영원한 완전성에 대한 깨달음, 미소, 단일성이 그의 내면에서 서서히 꽃피어났으며, 바주데바의 늙은 동안으로부터 그에게 반사되어 비추었다.”
“전체, 단일성에 귀를 기울일 때면, 그 수천개의 소리가 어우러진 위대한 노래는 단 한 개의 말로 이루어지는 것이었으니, 그것은 바로 완성이라는 의미의 옴이라는 말이었다.”
뱃사공으로서 그가 구도자의 삶을 살았던 평생의 친구 고빈다를 만나서 대화하는 이야기가 이 소설의 마지막이다. 이전의 싯다르타의 많은 모험은 모두 이를 위한 것이었다.
“누군가 구도를 할 경우에는, 그 사람의 눈은 오로지 자기가 구하는 것만을 보게 되어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으며 자기 내면에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결과가 생기기 쉽지요. 그도 그럴 것이 그 사람은 오로지 항상 자기가 찾고자 하는 것만을 생각하는 까닭이며, 그 사람은 하나의 목표를 갖고 있는 까닭이며, 그 사람은 그 목표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까닭이지요. 구한다는 것은 하나의 목표를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찾아낸다는 것은 자유로운 상태, 열려 있는 상태, 아무 목표도 갖고 있지 않음을 뜻합니다. 당신은 어쩌면 실제로 구도자일 수도 있겠군요. 목표에 급급한 나머지 바로 당신의 눈앞에 있는 많은 것을 보지 못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먼저,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구하고자 함이 아니라 자유로운 상태에서 찾아낸다는 점에 주목한다. 오랜 진로 탐색의 기간이 있었고 이젠 어떤 길을 걸어갈지 완전히 정했다고 스스로 생각했거늘,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생김으로써 다시금 여러 생각을 열어놓게 됐다.
사관학교에서부터 이런저런 책을 통해서, 그리고 독일에서도 1년 정도는 여러 분야를 접했기에 이젠 실용적인 공부에 집중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다양한 분야에 대한 호기심이 다시금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리고 그 호기심의 기반에는 공학 공부만으로 세상을 바꾸는데 공헌할 수 있다는 것에 회의감으로부터 기인한다. 어쩌면 1년 넘게 공학도만 모여있는 곳에서 조금 닫혀 있는 사고를 하지 않았나 싶은 성찰도 함께 한다. 어쩌면 어떻게든 이 위기의 기후변화를 해결해야 한다는 목표에만 몰두해 다른 의견을 들어보려고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다양한 생각이 있고 그 생각이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임을 받아들이고 설득하고 토의하는 과정이 필요한 법이라는 걸 스스로 깨닫고 있다.
이런 이유로 한 가지의 목표로 달려가기보다는 찾아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기 위해선 더 많은 분야를 접하고 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해야 하겠다는 결론이다.
이어서, 모든 가르침이나 말보다는 그 삶 속에 지혜가 있다는 점이 와닿는다. 또, 앎이라는 건 전달될 수 있지만, 깨달음과 같은 지혜는 전달될 수 없다. 어쩌면 그런 의미에서 공부는 스스로 해야만 의미가 있는 법이다. 즉 본인이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여 사람들에게 전달하려고 해도 그것이 그대로 절대로 깨달음을 줄 수 없다는 점을 상기한다. 아버지가 깨달음을 얻어 아들에게 ‘내가 예전에 다 해 봐서 아는 일이니 이렇게 하지 마라.’라고 하여도 아들은 똑같은 깨달음을 얻을 수 없고, 직접 부딪히고 깨져봐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당신이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던 것은, 당신 아들이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는 운명으로부터 벗어나게 위해서였다, 당신은 설마 정말로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리고 도대체 당신이 무슨 능력으로 당신 아들을 윤회의 소용돌이로부터 보호해줄 수 있다는 겁니까?”
“생각하여 보지 않았거나 알지 못하였던 말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가 실천으로 옮길 수 없는 그런 앎에 불과하였다...(중략) 그는 이 사랑이, 자기 아들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이, 일종의 번뇌요, 매우 인간적인 어떤 것이라는 사실과, 또한 이 사랑이 윤회요, 흐릿한 슬픔의 원천이요, 시커먼 강물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어서 누군가를 전적으로 악인이거나 선인으로 선 그을 수 없고, 비슷한 맥락으로 어떠한 생명도 살상할 수 없는 불교의 세계와 더불어 열반이라는 경지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다.
“한 인간이나 한 행위가 전적인 윤회나 전적인 열반인 경우란 결코 없으며, 한 인간이 온통 신성하거나 온통 죄악으로 가득 차 있는 경우란 결코 없네. 그런데도 그렇게 보이는 까닭은 우리가 시간을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네. 시간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네.”
다음은 우리가 알고 있는 깨달음,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열반을 주인공이 이야기한다.
“나도 죄인이고 자네도 죄인이야. 그러나 그 죄인이 언젠가는 다시 브라흐마가 될 거싱고, 언젠가는 열반에 이르게 될 것이고, 부처가 될 거야. 그런데 이걸 알아두게. 이 ‘언젠가’라는 것은 착각이고 다만 비유에 불과한 것임을 말이야! 그 죄인은 불성으로 나아가는 도중에 있는 것이 아니야. 그 죄인은 어떤 하나의 발전 과정 속에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야. 비록 우리의 사유라는 것이 만사를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고 달리 생각할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지만 말이지. 그 죄인의 내면에는 지금 그리고 오늘 이미 미래의 부처가 깃들어 있다. 그 죄인의 미래라는 것은 모두 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네....(중략) 이 세계는 불완전한 것도 아니며, 완성을 향하여 서서히 나아가는 도중에 있는 것도 아니네. 이 세계는 매 순간순간 완성된 상태에 있으며, 온갖 죄업은 이미 그 자체 내에 자비를 지니고 있으며, .... 죽어가는 사람도 모두 자기 내면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지.”
“어떤 하나의 발전 과정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미래의 부처가 깃들어 있다.”
사실 이런 이유로 깨달은 이의 가르침을 들어서도 아니고, 그걸 얻겠다고 수행하며 나아간다고 얻는 것도 아니고, 결국은 그 부처를 내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게 핵심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세계가 불완전하거나 완성을 위해 나아가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그 자체로 완성되었다는 점이 굉장히 흥미롭고 머리를 탁 치는 듯하다. 똑같은 이유로 세상 모든 것엔 부처가 있는 법인 셈이다.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놔둔 채 그 세상 자체를 사랑하기 위하여 그리고 기꺼이 그 세상의 일원이 되기 위하여, 내가 죄악을 매우 필요로 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네....(중략) 내가 그것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까닭은 그것이 장차 언젠가는 이런 것 또는 저런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이미 오래전부터 그리고 항상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소설의 한 부분을 인용해본다. 말이 아니라 한 사람의 행위와 삶. 메시지보다 메신저가 중요한 게 아닌가.
“가르침은 아무런 단단함도, 아무런 부드러움도, 아무런 색깔도, 아무런 맛도 갖고 있지 않아. 그 가르침이라는 것은 말 이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지. 자네가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바로 이 가르침이라는 것, 바로 그 무수한 말들이 아닐까 싶어. 그 까닭은 말이지, 해탈과 미덕이라는 것도, 윤회와 열반이라는 것도 순전한 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야. 우리가 열반이라고 부르는 것,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아. 다만 열반이라는 단어만이 존재할 뿐이지.... (중략) 나에게는 말보다 사물이 더 마음이 들며, 그분(부처, 고타마)의 행위와 삶이 그분의 말씀보다 더 중요하며, 그분의 손짓이 그분의 사상들보다 더 중요해. 나는 그분의 위대성이 그분의 말씀, 그분의 사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행위, 그분의 삶에 있다고 생각해.
싯다르타가 열반에 이르고 이 소설이 마무리되는데, 싯다르타와 고타마가 결국은 모두 같은 모습을 한다는 점, 즉 모두에게 그 안에 부처가 있다는 점을, 부처의 본명과 연관되는 장치를 작가가 만들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언젠가 한번쯤은 불교의 사상을 조금 더 접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 하고 싶은 일은 정말 많다. 시간과 나의 에너지가 문제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