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독일에 방문한지 한달이 다 되어간다. 아버지는 올해를 마지막으로 30년 넘게 근무하던 연구소를 은퇴하는 동시에 마지막 해외 출장이라는 이유로 일정을 늘려 독일을 방문하신다고 했다. 다른 이들도 모두 공감할지는 모르겠으나 부모님이 방문하는 건 썩 달갑기만 한 이벤트는 아니다. 그냥 손님이 와도 대접까지는 아니더라도 준비하는게 썩 쉽지만은 않은데 부모님이 온다고 하는데 오죽하겠는가. 군에 있을 때만 해도 이 정도까지 생각하진 않았는데 이게 내가 나이가 들어가고, 어쩌면 내가 해외에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런 듯하다. 사실 부모님이 내게 베푼 은혜를 생각하면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지만, 아직 자식을 키워보지 않은 철부지인 나로선 하루하루 살아가는 내 십자가가 제일 크다.
그리하여 영국에 일정이 있으신데 굳이 멀리 독일까지 오시냐 했더니, ‘그래서 싫어?’라는 말에 ‘뭐, 오시고 싶으신데 오셔야죠.’는 말로 화답했다. 사실 나도 아버지의 마지막 해외 여행이라는 것에 감정이입을 하여 좋은 여행을 하셨으면 바라기도 했다.
이처럼 독일에서 적지 않은 시간 머무신다고 하니, 주변에 가볼 만한 곳을 생각해봤다. 나는 차 끌고 이곳저곳 가는 건 어떠냐고 하니, 그런 건 싫고 혼자 다니고 싶다며 다른 데는 몰라도 꼭 콘스탄츠, 웅장한 알프스 내지는 다른 구경거리보다도 광활한 호수 같은 것을 보고 싶다고 하셨다. 그렇게 영국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바젤 공항에 도착한 아버지를 차로 모시러 갔다. 처음에 차를 빌린다고 할 때만 해도 돈도 비쌀 텐데 그럴 필요 없겠단 이야기에 뭐 그 정도는 할 수 있다고 하니, 이어서 태도가 급변하여 이제야 사람 구실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 이 첫 단추가 아버지와의 시간을 귀국 날까지 순조롭게 만든 요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다음날 콘스탄츠로 혼자 떠나는 아버지를 위해 늦게까지 49유로티켓 발급을 도와줬는데, 피곤함과 더불어 큰 일교차로 컨디션이 급격하게 안 좋아져 다음날 몸살에 걸렸다. 아프면 걱정보다는 항상 잔소리와 더불어 야단을 맞았던 그동안의 세월을 생각하며 빨리 회복하려 애썼다. 더불어 논문의 방향성 내지는 많이 남아있는 의문 사항들을 물어보기 위해 여러 가지 공부를 더 한다고 스스로 더 달달 볶았다.
그렇게 콘스탄츠에서 하루 묵고 아버지는 새로운 우리집에 방문했다. 처음 살던 원룸짜리 아파트 형식의 그곳보다 훨씬 좋아진 집을 보며 아버지는 흡족해했다. 젊을 때 돈 더 아낀다고 가난하게 살다가 좋은 시절 다 보내버리면 소용이 없다며, 좋은 환경에서 살면서 돈도 더 쓰며 부자 같이 살라는 조언을 했다. 삼십 년을 아끼며 어렵게 살다가 돈 좀 모아서 나중에 부자처럼 쓰겠다고 해봐야 젊은 시절 다 보내면 무슨 소용이냐는 이야기였는데, 아버지의 그동안의 인생관이 다 담긴 조언이었다. 일정 부분 공감하는 건 이곳에 오면서 만나는 이웃이나 주변 동네의 분위기 자체가 이전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 경제적으론 굉장히 쪼들리지만, 이 선택이 더 나은 도약의 발판이 되리라 믿는다.
몸도 안 좋았고 이런저런 이유로 한식보다는 양식을 준비하자고 했는데, 오히려 준비한 것에 비해 손님의 만족도가 훨씬 높으니 성공했다. 그런 이유로 앞으로 손님이 오면 양식을 대접하는 게 더 현명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노력이 훨씬 많이 감에도 그 노력이 덜 보이는 한식보단 양식이 시간도, 노력도, 보기에도 더 좋아보일 수 있단 걸 몸소 깨달았달까.
논문에 대한 이야기도 적지 않게 이어졌다. 어릴 때 아버지가 뭔가를 알려줄 때도 비슷한 방식이었던 것 같은데, 질문 내지는 설명을 하면, 그저 친절히 알려주기보단 항상 되묻곤 한다.
예를 들면, ‘이런 가정을 했을 때, 이 상황에 대해선 어떻게 설명할건데?’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음에도 이 질문의 저의가 무엇인지 잘 몰랐는데, 결론은 예전부터 들었던 이야기와 비슷한 관점이었다. 수학적인 고민을 너무 많이 하는 것보다 이것이 실질적으로 사회에 어떤 필요한 연구가 되는지 고민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점. 나도 공감은 하지만 무엇보다 수학적인 공부가 부족했던 스스로 지난 두 달간의 공부는 중요했고 여러 연구가 그런 방향으로 진행되어 있다는 사실과 더불어 내 주변에 있는 이들이 수학을 진심으로 하는 이들이기에 더 그럴 수밖에 없었는데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는 계기가 됐다. 본인은 또 하루가 지나서 궁금한 게 있을 수도 있으니 다음날에도 물어보라고 했는데, 나름대로 생각한 게 다 해결이 되지 않아 그 이후엔 질문하지 않게 됐다.
다음날은 본인이 말씀하셨던 프랑스의 성을 방문하기로 했다. 나는 아버지가 이곳을 어떻게 알고 계시는가 신기하기도 했는데, 예전에 출장 중에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을 방문했는데 그 때부터 이 동네에서 제일 유명한 성이라고 하여 궁금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또 차를 빌려 여행을 시작했다.
가는 길에 일부러 경유지로 이곳에서 유명한 와인산지인 Kaiserstuhl로 향했다. 이곳에 사는 나도 직접 고개를 굽이굽이 넘어가는 건 처음이었는데, 경치도 정말 좋다. 예전에 오래된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그만 포기하고 돌아갔던 언덕도 지나갔는데, 사실 조금만 더 가면 됐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했다. 마치 조그만 고비만 넘으면 더 넓은 세상이 있는 우리 인생처럼. 재밌는 건 그 이외에도 더 많은 언덕이 계속 나왔다는 점에서 어쩌면 잘 돌아갔다는 생각도 했다. 조그만 마을마다 와인 상점이 줄지어 보였는데, 그중 한 곳에 들어갔고, 아주 합리적인 가격에 좋은 와인을 맛볼 수 있었다. 이미 전날에도 적지 않은 알코올량을 섭취했는데 아버지는 아침부터 와인 테이스팅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와인도 샀겠다, 서쪽으로 쭉 달려 프랑스로 넘어간다. 독일의 검은숲(Schwarzwald)이 있다면, 프랑스에는 Vosges가 있고, 그사이 있는 땅이 프랑스의 알자스와 지금 내가 사는 독일의 바덴 지역이고, 그 사이로 라인강이 흘러 대부분의 국경을 나누고 있다. 이 지역 모두를 통틀어 Upper Rhine Valley (혹은 Rhine graben)라고 하는데, 땅이 비옥하고 날씨가 온화한 편이다. 이탈리아나 프랑스 남부와 같은 지중해의 꽃에 사는 이들은 공감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이곳의 기후와 환경을 고려하면 유럽에서도 굉장히 축복받은 땅이지 않을까.
이 Vosges 위의 대표적인 성, Château du Haut-Koenigsbourg에 도착한다. 이름에도 샤또라고 적혀 있으니, 프랑스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독일의 왕을 의미하는 König, Burg은 성이나 마을을 뜻하니, 사실 독일 것이라는 걸 추측해볼 수 있다. 유난히 독일과 프랑스의 땅따먹기 싸움이 치열했던 곳인지라 그런지, 이곳의 소유권은 자주 바뀌곤 했다. 무엇보다 최초의 통일된 독일 제국이 형성된 1871년 이후, 대대적인 복원 공사가 이뤄져 지금의 모습과 비슷하게 되었는데, 그런 이유로 프랑스 내에 있는 성이긴 하지만, 독일에서 전형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성과 유사하다. 성 내부 자체가 엄청나게 특별할 건 사실 없다. 이 높은 곳에 이런 성이 있었다는 점, 경치가 아주 좋다는 점을 꼽고 싶다.
이어서 우린 이곳 주변에서 제일 유명한 도시, 콜마르로 향한다. 내가 이곳을 처음 방문했을 땐 5년 전, 파리를 여행할 때였는데, 그땐 이렇게까지 많은 관광객이 있지 않았던 것 같은데 지금은 너무나도 북적북적한다. 아버지는 이런 프랑스 마을을 오고 싶었다며 좋아하셨으나 개인적으론 프랑스의 아기자기한 아름다운 마을인 건 부정하지 않겠으나 너무나도 관광지화된 모습에 썩 매력을 느끼진 못했다. 조그만 강가에 배를 띄우고 ‘Petite Venise’라고 관광명소로 소개하는 것에서 이런 생각을 지울 수 없다고나 할까.
짧게 콜마르를 둘러보고 다시 독일로 향한다. 동쪽으로 향하니 보이는 검은숲의 봉우리들이 이젠 아주 친근하게 느껴진다. 라인강을 건너니 다시 독일이다. 가는 길엔 신중현, 송골매 등의 예전 한국 음악을 들었는데 아름다운 강산과 같은 곡이 나온 시대적 배경을 듣게 된다. 당시만 해도 그런 ‘건전한 곡’이 앨범 중 한두 개는 꼭 있어야 했고, 미인과 같은 곡은 퇴폐적이라며 금지곡이 되었다는 역사적 이야기다. 불과 70년대, 8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어떤 사회였던 것일까 하는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런 점에서 지금 우린 이런저런 이유로 불평불만을 하고 정치 및 현실사회에 실망 내지는 좌절하지만, 우리 사회가 이전보단 훨씬 나아졌다는 점에선 반박할 수 없을 테다.
다음날, 한국으로 떠나는 아버지는 저녁 비행기 전에 어딜 가냐고 묻다가 최초엔 가고 싶으셨던 하이델베르크가 너무 멀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다른 행선지를 생각하다가 바덴바덴을 가기로 한다. 처음엔 당연히 기차 타는 것으로 생각하다가 차를 빌린다고 하니, 역시나 좋다며 화답하는 모습이었다.
바덴바덴, 지난 겨울에 이어 다시 방문한다. 차량 중심의 부자 동네라고 툴툴거렸던 저번 방문을 기억하며 이번엔 차로 가니 역시 불편함이 덜하다. 예전 바덴 공국의 성이었던 바덴바덴 위의 성은, 전날 방문했던 성보다는 규모가 작지만, 운치가 있다. 그곳에서 내려와 바덴바덴 온천의 역사, 몇몇 주요 건축물들은 둘러보는데 역시 내가 사는 프라이부르크보단 훨씬 부티가 넘친다. 여긴 학생도시가 아니라 은퇴한 노부부들이 온천을 즐기는 등의 휴양지로서의 성격이 더 강하다고나 할까. 식당들의 물가도 보통 도시의 시세를 훌쩍 넘긴다. 이 사악한 물가는 정말이지 독일의 물가가 아니다.
그렇게 반나절, 바덴바덴에서의 시간을 보내고 아버지를 기차역까지 배웅했다. 지난 아버지와의 방문 때보다 여러모로 수월했던 건 정착까지는 아니지만 무리 없이 내가 이곳에서의 삶이 훨씬 더 익숙해졌다는 점. 3년 가까이 보낸 시간이 그저 시간만 보낸 게 아니라 그 속에서 정말 많이 노력하고 성장했다는 사실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그나저나 아버지는 내가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정정하시다는 점과 더불어 독기는 빠지고 더 유들유들해졌다고 느껴진다. 내가 이렇게 판단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게 전국민이 카카오톡으로 소통하는데도 끝내 안 깔던 아버지가 이곳 사람들이 쓰는 웟츠앱은 깔았다는 점에서 엿보인다고나 할까.
아버지기 떠나고, 바덴바덴에서 저번에 하지 못한 스파를 즐기고 돌아왔다. 가격은 말도 못하게 사악하지만 인생에 한번쯤, 150년된 로마식 목욕탕에 가본 건 의미 있는 경험이지 않을까. 아쉬운 건 한국의 흔한 목욕탕처럼 몸을 푹 지지는 따뜻한 물은 없었다는 점이다. 오히려 집 앞에 있는 스파엔 그런 탕도 있었는데 하며 굳이 비싼 곳 가지 말고 가격도 합리적인 우리 동네에 가자는 게 이번 여행의 결론이라면 결론이다.
프라이부르크는 여러모로 살기가 좋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