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짧은 유토피아?
완전한 학회라고는 할 수 없지만, 내가 관심 있는 분야의 일종의 국제 학술대회를 가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 나름대로 버킷리스트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런 기회가 주어질 수 있음에 감사했다.
웬만하면 비행기를 타지 않겠다고 다짐한 지 꽤 오래라, 기차로 이동경로를 알아보지만 순수 이동시간만 24시간이 넘는 비현실적인 경로다. 북독일까지 가는 것만 해도 반나절인데, 그곳에서 덴마크로 국경을 넘어 또 그곳에서 한참 스웨덴까지 가는 건 아무래도 무리이지 싶다. 집에서 제일 가까운 공항에는 스톡홀름으로 향하는 항공편이 없기에, 고민하다가 독일 프랑크푸르트가 아니라 스위스 취리히로 가보기로 했다. 매번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기차는 연착에, 공항 서비스도 그다지 훌륭하지 않은 터라, 한 번 경험해보고 싶었다.
아침 일찍, 집에서 나와 취리히로 향한다.
2년 반 전, 처음 독일에서의 삶을 시작했던 바이에른 소도시에서 프라이부르크로 이사할 때, 렌트카를 빌려 여행을 했었는데, 그 때 잠깐 시간을 내어 시내를 구경했었다. 그 당시 처음 취리히 호수를 보고, 시가지를 볼 때만 해도 이 도시만큼 살만한 곳이 있었나 싶었다.
중앙역부터 호수까지 이어진 구시가지와 중앙역 뒤에 아주 세련된 오피스 빌딩을 보면, 이곳 어딘가에 내 직장과 집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내게 이곳의 직장만 있다면, 꽤나 두둑한 월급을 받을 테다.
지리적인 위치도 환상적이긴 하다. 알프스가 지척이고, 바다를 보고 싶어도 내가 사는 곳보단 한 두시간은 더 가깝고, 비행기는 잘 안 탄다고 해도, 유럽 최대 공항 중 하나가 있다.
한편, 물가가 역시 독일보다 비싸긴 하지만, 그 물가 자체가 어마무시한 정도는 아닌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그만큼 지난 몇 년간 독일의 인플레이션이 무지막지했다는 것, 스위스 자체가 기타 독일 도시보다 삶의 질 측면에서 퍽 더 뛰어난지는 모르겠단 생각도 해봤다. 임금은 높겠지만 업무 강도나 노동 시장 자체가 팍팍하고, 외국인의 진입장벽이 높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이상적인지 모르겠단 생각도 잠시 해본다.
그 짧은 시간에도 인터넷이 오락가락했던 이유로, 겨우겨우 공항에 가는 열차를 탈 수 있었다.
취리히 공항은 내가 갔던 그 어떤 공항보다 월등하게 좋았다. 굳이 비교하자면 인천공항 정도가 비교가능한 수준이지만, 사람이 훨씬 적었던 이유로 너무나도 편안히 모든 절차를 통과했다.
너무나도 빨리 왔던 걸까. 스톡홀름으로 가기까지 아직도 한 시간이 더 남았다.
사실 어쩌면 웬만한 도시는 이제 학회나 출장이 아니고서야 여행할 이유가 거의 없다는 생각이 함께 들었다 (이제 허파에 바람이 너무 많이 들었나..). 그보단 삶의 여유가 없다고 보는 게 맞는지도 모르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괜히 독일인들이 휴가만 되면 남유럽의 어느 섬으로 가는 게 아닌가 보다. 나도 마찬가지로 신혼여행은 역시 남부로 떠나야겠다는 마음,, (난생 처음으로 그리스를 가보기로 했다.)
도착한 스톡홀름. 아주 흥미로운 도시이다. 정말 현대적이면서도 고전적인 아름다움이 공존한다. 조그만 섬으로 이루어진데다가 자연도 함께한 도시!
학회 외적으로, 스톡홀름 내에 새로 만들어지는 친환경단지에 대해 설명을 듣는 시간이 있었는데, 여러 부분 프라이부르크의 친환경 마을 Vauban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그들이 건축학적으로 월등히 앞선다는 느낌도 받았다. 무엇보다 실험 정신이 투철하다는 걸 느꼈다.
이는 여러 가지 다소 실험적인 건축 양식이나 공간 배치 등이 있었는데, 이를 주민들로부터 피드백을 받고 끊임없이 개선 내지는 모니터링하고, 결국은 그 일종의 실험 끝에 나온 제일 나은 시스템을 도출하는 것이 내겐 이상적으로 느껴졌다. 무엇보다 다소 실험적인 시스템을 적용하는 것!
설령 그것이 실수일지라도, 그 실수가 용납되는 시스템이 정말이지 부러웠다. 이런 마인드셋 덕분에 팬데믹 때도 마스크 없이 일상생활로 돌아가는 걸 아주 일찍 실험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물론, 그게 꼭 좋은 결과로 이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한편, 기후변화와 환경 문제에 아주 민감한 것 같으면서도 여러 합리화하려는 모습들도 엿볼 수 있었다. 친환경적인 건축을 한다고 하지만, 건축하는 것 자체가 이미 탄소 배출을 하는 거일 수 있고, 무엇보다 차량 통행량이 굉장히 많다.
또 하나 아주 흥미로운 건 공공 자전거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최초에 도입되었던 공공 자전거 시스템은 시민들이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갔다고 하는데... (자전거를 바다로 던져 버리는 경우가 수도 없이 많았다고 한다.) 듣고서도 믿기 어려운 이야기인데, 학회에 참가한 누군가는 이렇게 너무 청결한 도시에서 사는 청소년들은 그것이 너무 갑갑해 일탈하고 싶어질 수 있단 이야기를 한다. 믿거나 말거나, 우연히 시내에서 녹슨 공공 자전거를 보는데, 분명 이는 ‘침수 자전거’임이 분명하다.
친환경단지를 설명하는 건축가가 계절적 에너지 저장장치의 필요성에 대해 언급하여, 내가 덴마크에 이미 있는 시스템에 대해 설명하며, 스톡홀름에 적용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했는데, 반응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스웨덴인에게 덴마크의 것을 해보라고 해서 그랬을까? 아니면 본인이 더 잘 안다고 생각하는데, 처음 보는 젊은 동양인이 말해서 긁혔을까. 알 수는 없지만, 아쉬웠다.
이외에도 아주 흥미로웠던 건 쓰레기가 연결된 파이프라인. 직접 쓰레기차가 수거하는 것보다 훨씬 경제적으로도, 환경적으로도 나은 옵션이라는 점에 적극 공감했다. 여러모로 아주 흥미로운 기술이 많이 적용되는 도시임은 분명하다.
학회.
먼저, 컨퍼런스의 진행 자체가 아주 말끔했다. 누군가가 KTH (스톡홀름에 위치한 스웨덴 왕립 공과대학)에서 하는 수학 관련 학회가 본인이 갔던 학회 중 행사 진행이 제일 훌륭했다고 했는데, 나 또한 그런 느낌을 받았다 (물론 나는 처음이지만). 시설이나 식사까지 모든 부분이 아주 만족스러웠다. 학교 식당에서 나오는 점심식사까지 주최 측에서 내주니 좋았는데, 식사가 아주 훌륭했다. (얼마나 감사한지...)
전세계, 아니 대부분 유럽 대륙에서 나와 비슷한 관심사를 갖고 그 분야에서 일하는 많은 젊은이부터 경험이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일단 내가 발표했던 주제가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준 것이 주효했다. 모두 처음 보는 이들이었는데, 관심을 두는 것을 넘어 굉장히 존중해주었다. 몇몇 이들은 내가 우리 회사의 CEO 내지는 박사를 당연히 마쳤겠거니 하고 이야기하는 예도 많았는데, 아주 감개무량했다. 내가 그랬다면 얼마나 좋았겠냐며 너스레를 떨었다.
학회를 마치고 시내를 구경할 겸 떠나려던 차에 학회 내내 꽤 목소리가 컸던 아재와 같이 길을 함께 했다. 말하는 것만 봐도 딱 미국인인 아재였기에 그냥 스몰톡만 하고, 어쩌다가 스웨덴에서 일하게 되었냐 정도만 이야기하고, 작별인사를 건넸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옥스퍼드와 하버드에서 공부하고 학계에 잔뼈가 꽤 굵은 사람이란 걸 알게 됐다. 와우. 굉장히 겸손해지는 순간이었다.
스톡홀름에서의 시간을 마지막으로 보낼 때즈음.. 뭐 물론 언젠가 이곳에서 사는 생각도 해봤다. 도시가 정말 세련됐고 매력 있었다. 그런 한편, 내가 여기까지 와서 살게 될까 싶은 생각, 굳이? 덴마크보다도 더 먼 이곳을? 정도의 생각을 하게끔 했다.
스웨덴의 좋은 점(?)이라면, 굉장히 평등의 이념이 잘 자리잡힌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곳의 공공주택비율은 굉장히 많은 편인데, 국적 불문, 먼저 신청하는 사람이 그 집을 얻는 개념이다. 즉, 한국 국적으로 스웨덴 시내에 방 두 개 짜리 집에 입찰을 하면, 스웨덴 사람과 동일하게 기다리고, 집을 받을 수 있다. 가격은 물론, 시세보다 저렴하다. 문제는 그 기간이 너무 길다는 점. 짧게는 1년, 길게는 2년까지도 기다린다고 한다. (이게 좋다고도 느껴지는 건 독일에선 방을 구하고 싶다고 집주인들에게 수십번, 수백번의 '원서'를 쓰고서도 방을 못 얻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민자가 워낙 많다고 하는데, 누군가 스웨덴 인구의 20%가 최근 이민을 온 이민자들이라고 한다. 정말 거리를 걷다 보면 외국인이 많다는 게 피부로 느껴진다.
어쨌든 지금 스웨덴에선 시도 때도 없이 강력범죄가 일어난다고도 하는데, 이민에 관한 찬반이 극명하게 엇갈리는 듯하다. 유럽 어느 국가와도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는데, 이민에 따른 부작용이 스웨덴은 더 심각한데, 국민들의 포용성은 더 높다고 해도 되려나. 위의 사례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한편, 그곳 삶에서의 상류층들은 이런 문제를 신경쓰지 않고, 본인들 내부의 버블 안에서 산다는 이야기도 듣게 됐다. 아무래도 왕정 국가인데다가, 독일처럼 나라가 전쟁 통으로 철저하게 부서진 사례가 없었으니 그런 게 더 쉽게 눈에 띌 수도 있겠다. 영국의 엘리트 층이 최근 잇다른 실책을 저지른 것과 비슷한 느낌인지도 모르겠다.
최근 누군가가 유럽 사회에서 살면, 매달 벌어 먹고 살고, 나중에도 그 시스템에 그냥 묻어서 산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 와중에 부자들은 자녀들을 사립학교에 보내고, 온갖 귀족 스포츠를 누리게 한다. 물론, 나보다 어려운 이들이 훨씬 더 많겠지만.. 그냥 이곳에서의 중산층은 겨우겨우 집도 한 채 마련은커녕 비싼 월세를 내며 그냥 한 달 벌어 살곤 한다. 어디나 사람 사는 거는 팍팍하다.
그래서 결국 중요한 게 돈 몇 푼 더 버는 것보다도 내가 하는 일에 사명감을 느끼는 것일 테다. 그래야 팍팍한 삶에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원동력이 되지 않겠는가.
어찌됐든 참으로 뜻깊은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