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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책과 생각

일리아스

서양 문화의 시조새

by 송다니엘


읽기 시작해서부터 완독까지 무려 6개월이 넘게 걸렸다. 그렇게까지 걸린 이유는 책이 두꺼워서라기보다도, 내 삶이 그만큼 바빴다. 결혼 준비, 그 이후에도 논문 수정 등으로 퇴근 후와 주말이 완전히 삭제된 기간도 꽤 길었다. 물리적인 시간도 부족했고, 무엇보다 에너지도 부족했다.


고전 중의 고전, 호메로스를 내가 꼭 읽으려 했던 이유는, 신혼여행을 그리스로 간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더 큰 이유가 있었는데, 이는 내가 독일을 선택한 이래 제일 오랫동안 공부한 인물인 괴테가 그렇게도 호메로스를 찬양했기 때문이다. 옮긴이 최병희 교수의 설명에도 이렇게 서술되어 있다.


“질풍노도 (Strum und Drang) 문학에서 습득이나 기교, 규범보다 천재성과 사실성, 독창성이 더 중시됨에 따라 호메로스는 일약 문학에서 불멸의 사표로 추앙받는데 그러한 경향을 주도한 인물로는 괴테가 있다.”

(그나저나 옮긴이는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유학하셔서 그런지, 독일 책을 많이 인용했다.)


이처럼 괴테의 책들, 특히 이탈리아 기행엔 호메로스의 관련된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지, 꼭 읽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들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정작 본인은 이탈리아만 동경했지, 실제로 그리스를 가지도 않았고, 가고 싶다는 이야기가 전혀 없는데, 그게 시칠리아에서 고대 그리스의 원형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로마가 훨씬 뛰어나다고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당시에 물리적으로 멀고, 무엇보다 투르크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인가 싶은 생각이 든다.




한편, 괴테만큼이나 그리스에 진심이었던 독일의 지식인으로는 하이데거가 있다. 그는 그냥 상상 속에서만 간직하고 싶다가 말년에 가게 그리스를 방문하였는데, 처음엔 수많은 관광객 때문에 싫증을 느꼈지만, 나중에는 그곳에 갔던 기억들을 아름답게 기억하곤 했다.


이처럼 그리스는 서양 문명의 시조새이며, 호메로스는 그 그리스 문학의 시작이자 완성이다. 그것을 상징하는 것이, 내가 사는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제일 오래된 건물인, 문과대학의 정문에는 이 위대한 시인 호메로스의 동상과 그 옆에는 아리스토텔레스 동상이 있다.

프라이부르크 문과대학의 정문. 호메로스와 아리스토텔레스.


이런 수많은 평가에도, 나는 이 위대한 문학이 그다지 와닿지 않았다. 한 젊은이의 분노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죽고, 신들이 어떻게든 그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 이리저리 싸우는 모습이, 21세기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얼마나 와닿겠는가.


또, 내가 어린 시절 읽던 그리스 신화는, 물론 만화여서 그런지 엄청 빠른 호흡으로 지나갔거늘, 일리아스의 시간적 배경이 총 9년의 긴 트로이아 전쟁 중 단 50일에 불과하니 다소 지루하게 느껴진 것도 없지 않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호메로스는 트로이아 전쟁을 전부 다 취급하려 하지 않았다. ... 그는 전체에서 한 부분만 취했으며, 그밖의 많은 사건들은 삽화로 이용되고 있다.”


그런 이유로, 적어도 내겐 마지막 아킬레우스가 아가멤논과 화해하고, 본인의 벗을 죽인 헥토르와 싸우는 장면까지 만이 흥미진진하고 박진감 있게 느껴졌다.


아무튼, 이런 것도 옮긴이의 말처럼, 일리아스가 오직 용기와 명성만을 추구하던 옛 가치관을 이상화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와 반대로 오뒷세이아는 현실에 유연하게 대처해 나가는 새 시대의 가치관을 이상화한다고 하니, 내겐 어쩌면 오딧세우스가 더 와닿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아무래도 똑같은 곳에서 죽고 죽이는 전쟁 이야기보다도, 트로이 전쟁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여러 곳을 돌아다니는 오딧세우스의 이야기가, 그리스 지형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나, 여러모로 더 흥미롭지 않겠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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