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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책과 생각

20세기 독일의 현대사를 관통했던 철학자, 하이데거

과연 독일은 역사 속에서 배울 수 있을까

by 송다니엘

고국에서 온 선배가 들고 온 두꺼운 한 철학자에 관한 책. 워낙 두껍기도 두껍지만 내용도 어렵고 생소하니 세 달이 걸렸다. 그간 내 인생이 바쁘기도 했던 모양이다. 그런 한편, 꼭 쉬는 시간을 잘 활용했다고 할 수도 없으니 그건 나의 잘못이겠다.


그저 지나가다가 누가 하이데거에 대해 몇 마디를 하면, 그런가 보다 했을 정도. 그렇게 말하는 이도 정말 제대로 알긴 했을까.


나는 무엇보다 그가 한때 국가사회주의, 나치당원으로서 활동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런 이유로 그를 경멸했다고 생각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사는 프라이부르크엔 나치에 의해 희생당한 유대인을 추모하기 위해 도로 바닥에 희생당한 이들의 이름과 정보가 그들이 관련되어 있는 곳에 적혀있는데, 대학의 제일 오래된 건물인 문과대학 건물에 하이데거의 스승이자 또다른 위대한 철학자인 후설의 이름도 있다. 그런 걸 보면서 은근 하이데거에 대한 적개심을 품어왔다고나 할까.


이런 이유에도, 니체의 삶에 대해 알게 된 이후에, 내가 사는 이곳의 대표적인 철학자의 삶을 호기심이 생겼다. 적어도 그보다 유명한 이는 이 검은숲의 수도에는 내가 알기론 없다. 그리하여 이제 그의 삶을 정리해보기로 한다.



프라이부르크로부터 약 100km. 검은숲을 넘어 동쪽으로 가다 보면, 메스키르히(Meßkirch)라는 작은 독일 마을이 있다. 이 작은 독일 마을이 그의 철학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그는 고향을 이렇게 표현한다.

“하늘의 광대함에 자기를 열어 놓는 동시에 대지의 어두움 속에 뿌리를 내리다.”


그곳에서 교회지기이자 술통 제조자의 아들로, 마르틴이 태어났다. 이곳은 그저 작은 마을 그 이상이었다. 다음의 설명을 살펴보자.


‘19세기 초 이래로 바덴에는 강력한 자유주의 전통이 자리잡았다. 바덴은 1848년 혁명의 아성이었다. 1871년 이후에도 이곳 사람들은 프로이센의 풍취를 풍기는 것들을 늘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나 바덴의 자유주의도 결국은 제국과 타협했는데, 이는 가톨릭교회라는 또다른 적대자가 대두한 때문이기도 했다.
가톨릭 대중주의는 반프로이센의 경향이 강했으며, 민족주의보다는 지역주의의 색채를 띠었고, 반자본주의, 반유대주의, 향토주의의 성향을 보였으며, 특히 사회 하위 계층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1870년 교황 무류성의 교리에 반발하여 형성된 세력이 이른바 ‘구가톨릭’ 운동. 이 운동의 사회적 뿌리는 무엇보다 남부 독일의 민족주의-자유주의적 가톨릭 교양시민계급에 있었다. 이들은 가톨릭적인 것과 민족적인 것들을 결합시키고자 했으며, 거기서 더 나아가 교회 전반의 현대화를 추구했다(독신 계율의 폐지, 성자숭배의 제한, 교구의 자율화, 성직자 선출).
메스키르히는 이런 운동의 아성 중 하나였다. 그래서 ‘로마파’는 이 조그만 마을에서 사소한 공직이나마 얻으려면 배교행위를 했어야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지조를 지킨 사람들도 있었으니, 하이데거의 아버지도 그중 하나였다. 그는 이런저런 불이익을 당하면서도 이른바 ‘로마파’로 머물렀다. 어린 마르틴은 이런 다툼에서 처음으로 전통과 모던의 대립을 체험했다. 마르틴은 그러한 모던에서 유해한 측면을 감지했다.


한편, 가난한 시골 청년인 그는 독실한 천주교 집안으로 어릴 때는 성당의 종치기이자 미사 주례 때 복사도 섰는데 그의 회상을 살펴보자.


“교회의 여러 축일과 대축일, 사계절의 순환, 그리고 나날의 아침과 점심과 저녁 시간을 서로 이어준 비밀스런 이음매는 어린 마음과 꿈과 기도와 놀이 사이로 어떤 종소리가 끊임없이 울려퍼지게 했다. 아마도 종탑의 가장 매혹적이며 가장 완전하고 가장 영속적인 비밀 중의 하나를 품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이음매일 것이다.”


작은 마을의 수재였던 그는 장학생으로 콘스탄츠 기숙학교에 입학한다. 다음의 설명이다.

“하이데거 가족은 풍족한 편은 아니었지만 가난하지도 않았다. 자식들을 자비로 상급 학교에 보낼만큼 넉넉지는 않았다. 이 시점에서 교회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교회가 재능 있는 아이들을 지원하는 동시에 사제 후속 세대를 양성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으며, 특히 시골 지역에서는 그랬다. 부모는 교회가 아들을 거둬들인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마르틴에게는 교회에 경제적으로 종속되는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제 그는 감사의 의무만을 안게 되었다.”
“하이데거는 마음으로 이미 교회를 등지기 시작한 후에도 한동안 가톨릭 세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를 받아들여야 했으며, 그로 인해 수치심을 느꼈다. 가톨릭 체계는 공적 영역에서 이익을 추구하는 정책을 펼쳤기에 마르틴에게 혐오감을 안겼다. 그렇기에 후일 그는 반교회주의를 표방한다는 점 때문에라도 나치 운동에 공감했다.”


이후, 예수회의 수사로 입회도 하였지만, 심장병이 발병했고, 프라이부르크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게 된다. 그리고 이윽고 성직자로서의 길을 포기하게 된다.

“신학생 기숙사에 거주하며 3학기동안 신학을 공부하고 났을 때 그의 심장에 다시 이상이 나타났다. 그가 1915년 이력서에 밝힌대로 아마 ”과로한“ 탓이겠지만, 어쩌면 그릇된 공부에 대한 신체의 저항일지도 몰랐다.”


가난했던 그는 교회의 지원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교회를 위한 학문’을 하여 학위를 마친다. 다음의 글을 보자.


하이데거는 장학금을 받기 위해 1913년 프라이부르크 주교좌 교회참사회에 이러한 내용의 청원서를 보냈다.

”이 지극히 순종적인 종복은 고귀하신 교회참사회에 (...) 장학금 수여라는 보잘것없는 청원을 감히 (...) 제출하는 바입니다. 이 지극히 순종적인 종복은 기독교철학에 헌신하여 학자로서의 경력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이 종복은 너무나 부족한 형편에서 생활하고 있기에 그렇게 해주신다면 고귀하신 교회참사회에 진심으로 감사드릴 것입니다 (...)“

이런 굴종적인 편지를 쓰는 혹은 써야만 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가시가 남는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탄원해야 했던 이들을 쉽게 용서하지 못한다.

곤궁한 삶과 가톨릭과 관련된 공부를 했던 그가, 본인이 선망하는 철학계의 주류에 편승하는 건 무리였다. 하지만 의지가 있다면 할 수 있다고 했던가. 여러 어려움 끝에 교회와의 관계를 끊고, 철학계에 투신한다. 그리고 그가 두각을 나타내는 건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음은 몇가지 일화다.


“1915년 봄 교수 자격 논문을 완성해 이를 리케르트에게 제출한다. ... 그는 젊은 하이데거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의 눈에 젊은 하이데거는 가톨릭 철학이라는 구석진 분야에 속한 사람이었다. 리케르트는 하이데거로부터 논문을 받았지만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엥엘베르트 크렙스에게 논문을 건네고는 알아서 점수를 매기게 했다. 그렇게 점수가 매겨진 논문을 리케르트는 통과시켰다.”
후설이 프라이부르크에 온 후로 하이데거는 이 거장에 가까이 가려 했지만 처음에는 냉담한 반응밖에 얻지 못했다. 하이데거는 후설의 눈에 가톨릭 철학자로 비쳤고, 그렇기에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했다. 하이데거는 근 1년동안 성과 없는 노력을 되풀이하다가 마침내 후설과 개인적 면담을 하게 되었다. 1917년, 후설은 하이데거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내 힘이 닿는 한 기꺼이 자네 연구를 지원하겠네.”

후설의 조교가 된 이후,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강의로서 꽤 큰 명성을 쌓게 된다.

“어느새 많은 사람들이 그를 철학의 비밀스런 왕으로 여겼다. 슈바벤 산 모직 옷을 입은 왕이었다.”

이때까지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한 건 무엇보다 그의 삶에 관련된 지명 대부분이 내게 낯이 익어서다. 프라이부르크는 물론이고, 그의 유년 시절과 관계있던 보이론의 수도원, 콘스탄츠와 그가 후일 오두막을 지었던 검은숲의 토트나우까지. 그의 사상을 내가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으나 그래도 그의 마음이 어떤지는 알 것만 같다. 이 남서부의 독일에서 살면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던 나로선. 프라이부르크에 대한 설명을 보자 (아! 아름다운 나의 집...)


이 도시에는 전성기 고딕 양식을 완성시킨 대성당이 우뚝 서 있다. 대성당은 마치 브라이스가우 만으로 나가려는 거대한 선박처럼 슈바르츠발트 산맥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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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세계대전 전까지는 대성당 주변의 프라이부르크 구도심이 예로부터의 모습을 거의 온전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대성당 광장을 중심으로 수많은 골목이 방사형으로 뻗어나갔으며, 이 골목길 대부분이 작은 운하들과도 연결되었다. 신학생 기숙학교는 성직자들의 호화로운 저택 가까이에 있었다.
젊은 마르틴이 전학 왔을 무렵의 프라이부르크는 한 세기 전 줄피츠 부아세레가 괴테에게 보내 편지에서 묘사했던 풍모를 여전히 지니고 있었다. “프라이부르크에 관해서는 한 권의 책이라도 써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곳만큼 빼어난 장소는 없으며, 모든 옛것이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보존된 아주 훌륭한 곳입니다. 골목마다 수정처럼 맑은 개천이 흐르고, 골목마다 고풍스런 분수가 있습니다. ... 어딜 가나 포도나무가 있어서 여기저기 성벽과 예전의 요새였던 곳이 포도 잎사귀로 무성합니다.”


다음은 보이론.

도나우하우스와 빌덴슈타인 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보이론이 있는데, 이곳에는 베네딕트회 수도원이 있고, 한때는 아우구스티누스파의 성당참사회가 있었다. 이 적막한 수도승들의 세계에는 넓은 도서관과 가축우리와 헛간들도 있어서 마르틴 하이데거는 교회와 연을 끊은 후에도 그곳의 매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920년대에 그는 방학이면 몇 주 동안 수도원 독방에 머물곤 했다. 강의 금지를 당해 칩거 생활을 했던 1945~1949년에도 보이론 수도원만은 공공연히 드나들었다.

Kloster_Beuron_2009_Blick_von_Nordwesten.jpg 보이론 수도원. Wikipedia


토트나우베르크.

마르부르크로 이사하기 얼마 전 하이데거는 토트나우베르크에 한 뙈기 땅을 구입해 아주 소박한 오두막을 짓는다. 그가 직접 나서지는 않는다. 엘프리데(아내)가 모든 준비와 감독을 떠맡는다. 그 후로 토트나우베르크는 그가 세상에서 물러나는 장소이자, 그가 사색하는 폭풍의 언덕이다. 여기서부터 모든 길은 아래로 향한다.
Martin-Heidgger-s-hut-in-Todtnauberg.jpg 하이데거의 오두막. source: WELT




이후, 마틴은 아리스토텔레스 해석으로 주목을 받았고,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강사로서 이목을 끌며 그는 독일 중부 마르부르크 대학교수로 영전한다. 하나의 일화가 있다.

발트해의 남작이었던 하르트만은 밤의 인간이었다. 그는 정오쯤에 기상했고, 자정쯤 되어야 활기를 되찾았다. 그 또한 집에서 사교적인 모임을 가졌고, 토론은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가다머는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마르부르크로 온 하이데거가 아침 7시에 강의를 시작했고, 그것만으로도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우리는 하르트만 모임의 한밤중 시간을 더이상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마르부르크에 대한 설명도 살펴본다.

마르부르크. 이 조그만 대학 도시는 방학이면 텅텅 비어 깊은 잠에 빠졌고, 그럴 때면 하이데거는 토트나우베르크의 오두막으로 향했다. 그 도시에는 마땅히 숨을 곳이 없었다. 모두가 서로를 알았다. 술책을 꾸미고, 소도시 특유의 험담을 즐기고, 파벌을 짓고, 사소한 차이를 돋보이며 제멋에 겨워하는 게 일상인 곳이었다. 이른바 ‘교양인들’이 지배한다는 이유로 이 좁은 세계는 스스로를 큰 세계로 착각하고 있었다.


하이데거가 마르부르크에 있던 시절, 열여덟 유대인 소녀인 한나 아렌트가 그의 소문을 듣고 그에게 배우고자 마르부르크로 왔고, 교수라는 작자는 학생과 사적인 만남을 갖자마자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됐다. 하이데거는 이 관계를 누구에게도 알리지 못하도록 했으며, 한나는 이를 철저히 순종했다. 그리고 이 밀회는 하이데거가 그녀에게, 본인의 친구인 야스퍼스에게도 배우라며 하이델베르크로 추천하고, 그녀가 마르부르크를 떠난 이후에도 지속됐다. 그러면서도 하이데거는 아내와 헤어질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저 한나는 철학적으로 누구보다 본인을 잘 이해하는 뮤즈였을 뿐. 한나는 그를 떠나야만 삶이 가능했다. 그리고 그녀는 사랑하지 않은 사람과 순식간에 결혼했다.


마틴은 아주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스키복 차림으로 강의에 나타날 때도 많았고, 소식적엔 공도 잘 찼으며, 인간적으로 매력이 있는 인물이었던 건 확실하고, 학생들과 교류도 많았던 모양이다. 유명하고, 성공한 이들이 여성 편력이 많은 건 동서고금의 진리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쨌든.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희대의 철학 걸작, ‘존재와 시간’을 썼다. 이 책은 그의 사상의 제일 핵심, 현존재. 사실 그의 삶을 다룬 이 두꺼운 책을 읽고서도 내가 그 사상을 제대로 이해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우리가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모든 것에 질문하는 것을 그는 요구하는 듯하다. 간단히 요약된 명제를 살펴보자 (여러 번 읽어도 어렵다...)

첫째로, 현존재는 우선 현사실적으로 언제나 그것의 세계로 “분산”되어 있다.
둘째로, 분산에서 상실되긴 하지만 되가져올 수도 있는 현존재의 “근원적인 적극성과 역량”이 없다면, 이런 분산은 거의 인지될 수조차 없을 것이다.
셋째로, 분산으로부터의 이런 되가져옴은 명징함을 통한 충격을 필요로 한다. 참된 감각의 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하이데게에게서 그것은 불안의 기분, 권태의 기분이다. 이런 기분에서 양심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는바, 이를 통해 현존재로 자기 자신의 부름을 받는다.
넷째로, 집중과 분산, 즉 거대한 순간과 일상적 배려 사이의 이러한 동요는 ‘전체로서의 현존재’가 시야에 들어올 때만 가시적이 된다. 분산과 근원 사이의 동요가 전부이며, 그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다섯째로, 전체를 향한 이런 시선을 철학하는 자의 “극단적인 실존적 투입을 근거로” 해서만 가능하다. 기초존재론자는 자신이 “실존적으로” 체험한 것만을 실존론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 철학하는 자는 무엇을 투입해야 하는가? 그 자신의 불안과 권태, 양심의 부름에 대한 그 자신의 청취가 그 답이다. 참된 감각의 순간에서 시작되지 않는 철학하기는 뿌리가 없고 대상도 없다.


이 책으로 학계에서 명성을 얻은 그가, 스승이었던 후설의 후임으로 프라이부르크에 돌아오게 된다. 그야말로 금의환향이다. 적어도 이 책에서는 후설에 대한 평가가 좋지 않은데, 나는 잘은 모르겠지만 하이데거도 스승인 그를 그렇게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미 젊은 나이에 그를 뛰어넘었다고 생각한 걸까. 후설의 몇 가지 일화.


후설은 자신의 생각을 늘 숙성시키기만 하다가 결국 엄청난 양의 원고 뭉치만을 남겼다.
“착상은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을 출판해서는 안 된다.”
얼마 전 에디트 슈타인이 후설의 개인 조교 일을 그만두었다. (...) 후설은 에디트 슈타인에게 과도하게 일을 시킬 뿐, 그녀의 교수 자격 논문을 통과시켜 주려 하지 않았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후설은 다음과 같은 물음을 한번도 제기한 적이 없다. ’인간은, 좀더 정호가히 말해 지향적 의식이란 어떤 의미에서 존재적인가?‘ 후설은 그저 인간이란 ’자연을 향한 되던짐 (Gegenwurf)' 이라는 부정적 규정까지만 밀고 나갔다.




마침내 1930년대가 다가왔다. 국가사회주의의 열풍이 독일 전체를 휘감았다. 여기서 그는 이 모든 운동을 본인의 철학과 결부시키며 적극적인 나치 활동을 하게 된다.


“저는 이제야 제 확실한 작업의 시작단계에 이르렀습니다. 그 시대의 진정한 철학, 다시 말해 그 시대를 지배하는 철학만이 참으로 지속하는 철학이 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철학이란 헤겔의 방식대로 그 시대를 사상에서 표현하는 철학일 뿐 아니라 그 시대를 지배하는 철학, 다시 말해 시대에 방향을 제시해야 하는 철학 혹은 현재를 극복해야 하는 철학이다.
그는 참담한 경제위기 상황과 붕괴하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혼돈 상태에서 질서를 회복할 힘이 국가사회주의 정당에 있다고 보며, 또 이 정당이야말로 공산주의 혁명의 위험을 막아낼 보루라고 믿는다.
“거친 통나무에는 거친 쐐기를 박아야 한다.”
이 시기 하이데거에게는 역사의 위대한 순간, 그가 플라톤 강의에서 뭔가 예감하듯 말했던 “전체 인간 존재의 변혁”이 도래한 것이다. 그리고 이 국가사회주의 혁명은 그에게 현존재를 지배할 만한 생생한 고유화가 된다. 그의 철학을 가장 깊은 핵심에서 관통하고 있으며 이 철학자로 하여금 “철학의 한계” 너머로 밀고 가는 그런 생생한 고유화가 되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이제 더 이상 이야기할 거리가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행해져야 한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하이데거에게 국가사회주의 혁명이란 신이 사라진 세계에서 “별을 탄생시키려는”(니체) 시도이다.

그전까지는 정치적인 그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던 그는, 이것이 그가 생각하는 ‘현존재’의 실현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특히나 보수적인 대학의 개혁을, 그는 이 혁명을 통해 실현할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이 되었고, 적극적으로 나치 이념, ‘총통원리’를 도입했다.


그는 반유대주의자, 반인종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를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 본인의 스승인 후설이 불명예스럽게 파면될 때도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고, 학문적 동지였던 야스퍼스가 유대인 아내가 있다는 이유로 곤경에 처할 때도 돕지 않았다. 다음의 일화를 보자.


국가사회주의는 잔혹한 반유대주의를 아주 일찌감치 드러냈음에도 하이데거는 이 운동에서 손을 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이런 행동에 지지를 보내지는 않았지만, 이를 불용인한 것도 아니었다. 하이데거는 폭도를 비호하는 것이 혁명에 대한 자신의 의무라고 믿었다.
하이데거는 점점 고립에 처하는 후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후설은 1933년 하이데거의 ‘배신’에 격노했지만 결국은 다시 마음이 풀어졌다.
“내 서클에 속했던 모든 이들 중에서 그 친구가 가장 재능이 뛰어날 거야.”
1937년, 야스퍼스는 교직에서 쫓겨났고 강의와 출판 금지 조치를 당했다. 하이데거는 이 일과 관련해 단 한마디의 위로도 하지 않았다. 이후 몇 년동안 유대인 게르투르트 야스퍼스는 언제든 압송될 수 있는 처지에 놓였다. 야스퍼스 부부는 그런 상황에 독약 캡슐을 지니고 다녔다.


그저 본인이 원하는 만큼 나치당과 반대 세력으로 대학 개혁이 급진적으로 이뤄지지 않자, 총장 자리를 그만두고 정치와 손을 끊었지, 그는 결코 행동하는 양심이 아니었다.

그는 철학의 권력 장악이 실패한 후 다시 고독한 철학으로 돌아간다.
“철학이 본질적으로 비시대적인 까닭은 철학이 결코 그 동시대에 직접적 반향을 얻을 수 없고, 얻어서도 안 될 운명을 지닌 소수의 것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후, 나치의 사유를 강단에서 공개적으로 비판해서 당에 감시를 받기도 하지만 그가 탄압받았다고는 전혀 할 수 없다. 그렇게 제3제국의 패망 이후, 프랑스 군정에 의해 주도된 정화위원회에서 그는 고초를 겪는다. 국제적 명성을 이용해 명예회복을 하려던 그는 오히려 역풍을 받았고, 한때 학문적 동지였던 야스퍼스에게 반인종주의자는 아니지만, 사상이 위험하다는 평가서를 받고 교수로서 강의할 수 없게 된다. 다음은 그의 철학적 동지였던 야스퍼스의 평가서이다 (다소 길지만 인상 깊어 인용한다.).


“많은 지식인들이 1933년 국가사회주의에 동참하여 지도적 영향력을 얻으려 했고 세계관의 측면에서 새로운 권력을 공개적으로 지지했으나 후일 개인적으로 배제당하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 이들은 나치 정권 아래서 고난을 겪었다고 느끼며, 그래서 다음 정권은 자기들 몫이라 여긴다. 이들은 나치의 반대자로 자처한다. 그 시절 내내 이들 나치 지식인들의 이데올로기는 이런 것이었다. ‘우리는 정신적 문제에서 편견 없이 진리를 말한다.’ ‘우리는 독일 정신의 전통을 보존한다.’ ‘우리는 파괴를 방지하고 있다.’ ‘우리는 개별적인 점에서 발전을 낳고 있다.’ (...)
1933년, 어엿한 성인으로서 내면의 확신을 품었던 사람들, 정치적 착각에 기인했을 뿐 아니라 국가사회주의가 고양시킨 존재 감정에 비롯된 내적 확신을 품었던 사람들, 이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깊이 작용하는 제련 없이는 결코 정화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상황에서 젊은 세대의 교육은 최대한 책임감 있게 추진되어야 합니다. 완전한 교육의 자유가 궁극적 목표이기는 하지만, 이 목표가 당장 달성될 수는 없습니다. 내게 하이데거의 사유 방식은 본질적으로 자유롭지 못하고 독재적이며 소통 능력을 결여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오늘날 이런 사유 방식은 교육 활동에 치명적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나는 그 공격성에서 쉽게 방향을 틀 수 있는 정치적 판단들의 내용보다 사유 방식이 더 중요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사람 내부에서 진정한 재탄생이 일어나고 이것이 저작에서도 표현되지 않는 한, 오늘날 그런 교육자가 젊은 세대, 내면에서 아직 거의 저항력을 갖지 못한 세대의 교육을 맡아서는 안 됩니다. 젊은이들은 우선 독립적으로 사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야스퍼스의 평가서는 하이데거의 국가사회주의 참여라는 외적 사건에 치중하지 않고 하이데거의 철학적 사유 양식 자체가 독일의 필수적인 정치적-도덕적 신생에 유해한 것이라고 판정한다.


그는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계속 사유했다. 그렇다고 그가 마냥 반성하고 참회한 건 아니다. 그는 기본적으로 나치 부역 활동을 부인했다.

하이데거는 죄책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사실 그는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그가 보기에 상황은 그저 다음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국가사회주의 혁명에 잠시 관여했을 뿐이다. 그것도 이 혁명을 형이상학적 혁명으로 생각한 때문이었다. 혁명이 그에게 약속한 바를 지키지 않았을 때 – 하지만 그는 혁명이 자신에게 약속한 바가 무엇인지 정확히 말하지 못한다 – 그는 뒤로 물러났으며, 당의 찬동이나 거부에 마음 쓰지 않고 철학적 작업에만 매진했다. 그는 자신의 체제에 비판적 거리를 두고 있음을 숨기지 않았고, 강의에서도 이를 표현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체제에 순응했으면서도 책임추궁을 당하지 않는 대다수 학자들보다 그의 체젲에 대한 책임은 적다. 체제가 저지르는 범죄를 그가 어찌 막을 수 있었겠는가? 하이데거는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말에 진심으로 놀랐다. 후일 야스퍼스에게 고백했듯, 잠시 동안 협력했다는 사실을 인정했으며, 그에 대해 수치심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은 착오를 범했다는, “착각”을 했다는 수치심이었다. (...) 따라서 그에게는 법적인 ㅡ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의미에서도 – 죄책감이 없었다.


그의 변명도 살펴보자.

“그런 착오는 더 위대한 사람들도 이미 범했습니다. 나폴레옹은 헤겔의 눈에 세계정신이었고, 횔덜린에게는 신들과 그리스도 또한 초대받은 축제에 자리한 왕자였습니다.”
그는 철학적인 눈으로 히틀러를 보았다. 그는 철학적 모티프들을 동원했고, 역사적 사건을 올릴 상상의 철학적 무대를 완공했다. ... 철학의 지배 원리를 포기하지 않기 위해 그는 국가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자신의 오인을 –당대 사건에 대한 자신의 철학적 해석이 아니라 – 정치적 경험 미숙 탓으로 돌린다.


재밌는 건 그의 아내는 철저한 반유대주의자로, 나치 선전과 활동에 남편보다도 훨씬 굉장히 적극적이었다. 이 모든 걸 학문적으로 제일 가까운 야스퍼스와 유대인인 한나는 견딜 수 없어 했다. 이미 연락을 끊게 된 지도 십수년.


1949년부터 그는 대학이 아니라 사설 강연에 나선다. 그곳에서 기술주의에 대해 비판을 하는데, 그것이 생 마지막까지 그를 사로잡게 한 주제였다. 그리고 1950년. 그의 뮤즈, 한나가 돌아왔다. 무력했던 제자의 모습이 아니라, 이미 모든 풍파를 겪어온 학자로서. 그리고 그는 다시 대학에서 강의도 할 수 있었는데, 그때쯤 한나의 책이 세계를 떠들썩하게 한다.


한나 아렌트의 독일 여행은 정말로 일종의 개선 행진 같았다. 자부심 강한 어느 유대인 여자가 돌아와 금세기 전체주의 실험에 관한 자신의 결산서를 내밀었고, 동시에 동시대 독일 고위 관료들을 엄중히 탄핵했다.
“파괴의 초인적 힘의 과정에 자발적으로 빠져드는 행위는 어쨌거나 사회 내 기존 기능들과 연결을 끊고 무의미한 진부성과도 연관을 끊어버리는 것처럼 보였다. 이 사람들은 모든 사념에서 정화된 잔혹하고 순수한 행동과 모든 인간 이해를 넘어선 잔혹하고 순수한 필연성의 압도적 힘에 대한 믿음의 융합에서, 겉으로만 모순적인 그 행동과 믿음의 융합에서 전체주의 운동의 매력을 느꼈고 지금도 그렇게 느낀다.”


이 책은 바로 전체주의의 기원이다. 그곳에서 그녀는 이를 “폭민과 엘리트의 일시적 동맹”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는 하이데거에게 큰 상처가 됐다. 그들은 또 몇 년간 서신을 중단한다.


말년에 그들은 다시 만나 그녀의 아내와 한나도 마침내 화해한다. 그리고 노신사로서 하이데거는 고향의 명예시민이 되고, 아주 편안한 말년을 보낸다. 그는 말년엔 교회도 나간다. 어쩌면 교회와도 화해를 했는지 모르지.


“그에게 메스키르히에 있는 서민들의 교회는 조금 다른 의미가 있었다. 그곳은 고향이었고, 평생 그는 거기 속해 있다고 느꼈다. 메스키르히에 있을 때면, 그는 고령이 되어서도 교회 예배에 빠지지 않았다. 종치기 소년이었을 적부터 앉았던 성가대석에 자리를 잡았다. ”
“우리는 역사적으로 사유해야 하네. 그리고 기도를 많이 드리는 곳에는 신적인 것이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가까이 있지.”
“또 다시 어느 철학가의 길이 어두음으로 되돌아간다.”


한 철학자가 정치에 관여하려다 모든 명성을 잃어버릴 뻔했던 과정을 보면, 학자든 전문가든 누구든 그 삶에 충실해야 하지 않냐는 생각을 하게끔 한다. 꼭 이 역사를 보지 않아도 우린 꽤 많은 사례를 보지 않았는가. 언급하고 싶진 않다.




마지막으로 작금의 정치상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근 몇 달 동안 하루가 다르게 이민자들이 저지르는 테러, 범죄가 일어나고 그와 관련해 이민자에 대한 엄청난 혐오가 쏟아졌다. 무엇이 닭인지 달걀인지는 알 수도, 알고 싶지도 않다.


사실 이 시작은 2015년, 프랑스에서 테러가 있고 나서였을까. 그때부터 코로나 시기를 거치며 덮였다가 다시금 수면 위에 올라오는 듯하다. 어쩌면 남부 유럽은 이미 이전부터 더 심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혐오가 꽤 심각하고, 그의 반대급부로 진보 진영에서 극우 정당에 대한 비난도 엄청나다. 다만 현재 이민자들의 테러가 날마다 끊임없이 나오는 이 순간에, 사람들의 선택지는 보수화될 수밖에 없다. 이 모든 과정이 90여년 전, 독일에서 벌어졌던 비극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경제의 불황, 양극화, 이민자 혹은 유대인에 대한 분노. 적어도 유대인과 달리 몇몇 이민자는 폭력을 쓰니 다르다고 해야 할까. 결국, 나 같은 피부색이 다른 이민자가 피 보게 될 상황이 올 수 있다. 물론, 극우정당이든 트럼프든, 합법적으로 일하고, 교육받은 이들도 내쫓아야 한다는 프로패건다를 하지는 않는다. 다만 혐오가 만연한 사회에 있는 것이 썩 안전하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지지할 만한 정당이 뚜렷하게 올바른 길을 주창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메시지는 좋은데 결과가 안 좋아서일까. 아니면 능력이 없는 걸까. 결과가 좋지 않으니, 능력이 좋지 않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이런 게 하이데거나 카를 슈미트 등과 같은 엘리트가 국가사회주의를 지지하고, 히틀러와 같은 지도자를 원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민주주의가 이 사회에 필요한 정치체제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

“민주주의적 공공성은 실제로 ‘세인’의 놀이터다. 잘 알려져 있듯, 비정치적이거나 반민주주의적인 전통에 각인된 대학의 고상한 사람들은 지극히 소수의 경우를 제외하면 바이마르 민주주의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그들은 민주주의에 속하는 모든 것, 예컨대 정당제도, 의견 및 생활양식의 다양성, 이른바 ‘진리’라는 것들의 상호상대화, 평균성, 그리고 비영웅적 규거겅을 경멸했다. ... 모든 정당을 초월해 민족의 본체를 정화하는 도덕 이념으로서의 국가, 그리고 카리스마를 가지고 민족의 정신을 표현해 내는 영도자적 인물이야말로 그들이 원하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전쟁 이후에도 그들은 끝까지 반성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사실을 접하다 보면, 독일이 일본과 달리 반성한다고 믿는 우리의 통념이 우습기도 하다. 독일도 마찬가지로 아데나워 시절, 공산권에 대항한다는 취지로 나치 부역자들을 공직 생활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 뉘른베르크 재판과 같은 전범 재판은 그저 극소수에 불과했고, 그리고 그마저도 제대로 처벌되지도 않았다.

이 글, 그리고 앞으로의 방향에 대한 나의 결론은 아직 정하지 못했다. 하이데거의 철학이 결론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물음을 제시하는 것처럼,

라이프니츠나 칸트나 쇼펜하우어의 철학에는 결과가 있지만 하이데거 사유의 결과란 없다. 하이데거가 열정을 바친 것은 물음이었지 대답이 아니었다. 그가 물음을 사유의 경건함이라 간주한 것은 물음에 의해 새로운 지평이 열리기 때문이었다. 하이데거의 생각으로 개방하는 힘은 특히 그가 철학적 삶에서 줄곧 제기해 온 하나의 물음을 소유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존재에 대한 물음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한계도 살펴보자.

“자기 자신에 관해 철학이 권력에 유혹당할 수 있음에 관해 침묵한 것이다. 더 나아가 그는 –사유의 역사에서 흔히 그렇듯-‘내가 사유할 때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그 한가지 물음을 제기하지 않았다. 사유하는 자는 사상을 갖지만 가끔은 그 역이기도 하다. 즉 사상이 사유하는 자를 갖는 것이다. 사유를 하는 자가 변화한다. 거대한 것을 사유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어떤 거대한 사건과 동일시하는 유혹에 쉽게 빠질 수 있다. 그는 존재에 발맞추려 하며-자신이 스스로에게 어떻게 나타나는가 대신 – 자신이 역사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에 주의를 기울인다. ”


나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그의 삶에서 이제 빠져나와, 그를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자 한다.

위대한 철학자요, 매력 있는 인간이겠지만 행동하지 않는 양심으로 끝까지 진실을 제대로 마주하지 않은 인간으로.


독일의 정치는 오늘로 그 향방을 알 수 있을 테다. 사실 이게 과장이 아니라 유럽의 미래와도 직관되어 있다고 느낀다. 또, 그 방향에 따라 어쩌면, 내 삶이 바뀔 수도 있겠다. 예를 들면, 급격한 정책의 변화로 회사 사정이 어려워져 내 미래가 불투명해진다는 최악의 시나리오와 같은 무엇. 다만 세상이 올바른 방향으로, 이어나가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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