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쓸모

벨 에포크 시대의 유산들

by 송다니엘

리옹 시내 언덕 위에 있는 큰 성당 (노틀담)은 리옹에서 제일 유명한 관광지 중 하나이다. 이곳에 오르면 리옹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고, 저 멀리 알프스의 웅장한 풍경, 그리고 리옹 시내를 흐르는 론과 손강이 보이기도 한다. 나는 이 성당이 궁금했다, 왜 이미 평지에 대성당이 있는데 또 다시 이곳에 지은 것인가 하고.


찾아보니 이것 역시 독일 (당시 프로이센)과 프랑스, 보불전쟁의 영향이었다. 리옹만큼은 전쟁의 참화를 겪지 않아 당시 사람들이 성모마리아에 감사하는 의미로 봉헌한 성당이라고 한다.

여기까지만 해도, 몽마르트에 있는 사크레쾨르 성당과 똑같은 유례가 있다고 생각하고 넘겼는데, 또 한편 의구심이 들었다. 왜 프랑스는 전쟁에서 패배했는데도 저렇게 거대한 건축물들을 남겼는가.



이건 그 당시 시대상과도 연관이 되어 있다. 보불전쟁 이후가 프랑스에선 벨 에포크, 말 그대로 아름다운 시대였다. 문화예술이 번성하던 때였고, 건축도 그 하나의 큰 축을 담당했다. 지금 대부분의 파리와 리옹, 낭시와 같은 곳에 ‘특별’하지도 않은 성격의 건물들이 화려하게 건축된 것도 대부분 이때라고 한다. 파리는 이중에서도 중심이었고, 여러 건축의 시도들이 있었고 전쟁의 참화를 피해 지금도 파리는 도시 전체가 그야말로 박물관처럼 남을 수 있었다.

그에 비해 독일은 워낙 프랑스보다 이런 시도가 덜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2차세계대전 전쟁의 참화를 많이 겪어 구시가지에 이와 같은 화려한 건축물이 남아 있지 않다 (이런 이유로 독일의 관광객이 프랑스에 비해 훨씬 적을 테다). 한편, 생각해보면 오스트리아의 빈이나 잘츠부르크 같은 곳에선 프랑스의 그것과 동일한 양식은 아니지만 화려한, 고풍스러운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이러한 화려한 예술에 대한 탐닉도 1차세계대전을 끝으로 완전히 사그러지게 됐다. 물론, 그 당시에도 이런 혜택을 받는 건 정말 소수 부르주아지들에게만 해당했고, 일반 노동자들에게는 해당치 못하는 일이었다. 이것이 인터내셔널 사회주의 운동이 벌어질 수 있는 계기이기도 했다. 한편, 문학이나 회화, 또 심지어 과학기술까지 이 시대는 그야말로 아름다운, 전성기였을 수도 있다. 이런 시대상을 대변하는 게 우디 앨런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가 아니겠는가 (혹시 보지 않은 분이 있다면 추천드린다.)




영화를 이야기하니,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

먼저 19세기 초, 최초에 사진이라는 게 발명되었을 때만 해도, 이것이 얼마나 큰 파장력이 있는 걸 상상해보자. 그전까진 무언갈 남기고 싶으면 그렸어야 했다. 그래서 회화의 중심이 현실적으로 그리는 것에만 집중했다. 다만 카메라가 생기니, 그게 큰 의미가 없어졌다. 개인이 바라보는, 그 어떠한 순간이 중요해졌다. 그렇게 생겨난 것이 인상주의라면, 이 영화라는 건 순간을 넘어 우리가 실제로 보는 무언가, 영상을 구현할 수 있게 됐다. 이 영화의 창시자인 뤼미에르 형제의 흔적이 리옹에 있다.

1895년 시작된 최초의 영화는 우리가 지금 보는 것처럼 대단한 기법이나 스토리는 없다. 그저 본인들 회사의 직원들이 퇴장하는 모습을 찍었을 뿐이다. 또, 그 아이디어 자체도 정말 많은 사진을 여러 번 찍어서 그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게 전부이다. 정말 많은 순간을 찍으면 영상이 될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이미 다른 이에게 있었다.

최초의 영화들


다만, 사진을 찍는다는 행위와 정말 많은 사진을 찍는다는 행위, 그리고 이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광학 장치까지. 그리고 이걸 보통 사람들에게 보여주어 오락의 경지까지 구현한다는 건 그들 이전에는 시도되지 않았다.


그들이 말년에 나치 정부의 꼭두가시인 비시 정부와의 협력한 일 때문에라도 명성이 많이 깎였지만, 지금도 존경받는 건 그만큼 그들이 만든 발명품이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은 그때보다 기술이 더 발전해 모두가 무언갈 찍고, 일종의 조그만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시대가 됐다. 그 시작은 리옹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프로방스에서 고흐의 흔적들을 쫓으며 생각해본다. 물론, 그가 벨 에포크 시대의 사람이어서 우리가 그 그림을 사랑한다고 보기는 어려울 수도 있으나, 그 시대에 이처럼 수많은 예술이 있기에 우리는 100년이 지난 지금도, 그 당시의 수많은 예술을 소비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한다. 사실 고흐의 그림이 대단한 것도 있지만, 결국은 그걸 소비하는 문화가 있었기에 이 모든 게 가능하지 않았을까.


이런 점에서 그런 화려하고, 예술에 탐닉하던 시대가 현대인에게 주는 가치란 건 어쩌면 예술을 즐길 수 있는 문화를 갖추게 해주었다는 점이다. 그게 당시에는 소수에게 국한되었을지는 몰라도.


지금 우리 시대에는 많은 게 대중적이고 보편화되었으면서도, 아직도 부는 편중되어있고, 아니 더욱 편중되어 있고, 사는 건 정말 더 팍팍해지고 있다. 부나 몇몇 예술은 지금도 편중되었을지도 모르나, 전반적인 대중예술이 꽤 많은 사람에게 널리 퍼진 덕분에 나 같은 평범한 사람도 이 머나먼 곳에서 생활하고, 이곳에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게 됐다. 대한민국 시민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하나의 개인으로서. 그런 점에서 전반적으로 우리 사회는 적어도 예전보다 조금은 더 평등한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더 그러길 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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