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과 성장의 시간

고흐의 흔적이 남아 있는 남프랑스에서

by 송다니엘

생레미 프로방스.


숙소 앞에 산책을 나갔는데, 반 고흐의 길이라고 해서, 고흐의 그림이 거리에 같이 붙어있다. 참으로 낭만적이었다. 또, 조그만 시내에 참으로 라벤더가 가득했다 (라벤더 철은 다 끝났고, 팔기만 한다). 시내 자체가 엄청나게 특별하진 않았는데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그곳에서 아를까지는 30분여.

아를은 고흐가 북쪽 나라에 있다가 처음으로 남프랑스로 오게 된 도시이다. 십수년 전, 처음으로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서 고흐의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 그림을 보고, 언젠가 가보고 싶다고 생각한 아를.


그래서 아를에 도착하자마자 고흐 관련된 미술작품이 있는 곳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는데, 사실 아를 자체는 실망적이었다. 내가 기대했던 아를만의 특별한 아름다움은 없었다. 외려 로마 시대의 원형극장이 볼만했고, 아를에 있는 론강에서 본 풍경은 리옹이나 아비뇽에 비할 바가 못되었다.

외려 공장이 보이는 정말 하나 특별할 것 없는 풍경이었고, 고흐가 그렸던 병원 건물 그 자체도 그다지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았다. 고흐가 그린 아주 유명한 카페 그림의 카페도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영업을 하지 않아서였을지, 아니면 원래 그랬을지. 이 역시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다.


나는 이를 통해 몇 가지를 생각해보았다.

하나는 고흐였기에 평범한 풍경이 아름다운 그림으로 탄생했다는 것. 즉 평범한 것에서 무언가를 바라보는 시선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조금 더 나아가면, 내가 위치한 곳에서 그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는 걸 느꼈다.


또 한편으로 아를은 그대로인데 내가 바라는 방향대로만 그 도시를 바라본 건 아닐지, 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게 꼭 올바른 방향이 아니라는 생각도 하게끔 했다. 즉 가끔은 너무나도 강한 나의 시선이 많은 걸 잃어버리게 하는 건 아닐까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아를의 밤거리를 조금 걷다보니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렇다고 아주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독일을 떠나기 전, 대전에서 봤었던 이우환 작가의 아틀리에도 볼 수 있었는데, 들어가보진 않았다. 그곳에 외국인이 일하는 걸 보고, 흥미롭게 느껴졌다. 프랑스 아를에, 한국인의 아틀리에에 일하는, 프랑스인이라. 자랑스럽다고 해도 될까.


이렇게 아를에서의 다소 실망스러운 감상을 하고 나니, 그렇게도 구석구석 많이 보고 싶던 프로방스의 여행지들이 추려졌다. 사실 최초 여행을 시작할 때만 해도, 님에 있는 수많은 로마 유적지나 몽펠리에, 혹은 프로방스의 고도에 있는 작은 소도시들을 포함한 멋진 풍경들을 시간이 허락한다면 다 보고 싶었다만, 굳이 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 5일차에 되어서야 이제 거기서 거기구나 하는 생각이 든 셈이다. 이곳에 한 달 살이를 하며 더 오래 산다면야 구석구석 보겠다만, 현실적으로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렇게 다음날엔 아주 간단하게 집앞에 있는 곳들을 가기로 했다. 이미 원래 굵직하게 보려고 했던 걸 전날, 하루에 세 탕을 뛰어버렸으니 무리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이곳 小알프스에 있는 수도원에 갔는데, 높은 고도에서 보는 풍경이 참 아름답고 마을도 아기자기하니 참 귀여웠다. 다만 이런 즐거움을 느낄 사이도 없이, 날씨가 갑자기 돌변해 비바람이 부는데 30분을 넘게 비바람에 오들오들 떨다 보니 더 이상 구경을 할 수 없이 내려왔다.


그렇게 산 위에서 내려와 마트에서 장을 보고, 도미를 사다가 매운탕을 끓여먹으니 참으로 좋았다. 이런 호사는 절대 가이드 투어를 해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라며, 아내와 서로 기뻐하다가 다시 집앞에 있는 고흐가 묵었던 정신병원이자 수도원인 곳을 향했다.

고흐는 아를에서 지내는 1년 중 마지막 시기에, 고갱과 심하게 다툰 후 귀를 잘랐는데, 그러곤 아를에 있는 사람들이 그를 쫓아냈으면 하고 청원을 했고, 그 여파로 고흐는 자진하여 이곳 생레미에 오게 되었다. 관련하여 고갱은 고흐가 면도칼로 위협도 했다고 하는데, 이는 고갱의 진술만을 근거로 하여 신빙성이 없다고도 한다.


한편, 아를과 생레미에서 있는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그는 엄청나게 많은 그림을 그리고 편지를 썼다는 안내문을 봤다. 그렇게 미친 사람처럼, 아니 정말 미쳐 있었으니 이런 위대한 그림이 탄생했겠거니 싶으면서도 그가 살던 곳을 직접 보니 참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실로 정말 생레미에서 보니, 그의 그림이 모두 이해가 가는 게... 풍경이 정말 그렇게 생겼다. 말로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또, 돈 맥클린의 유명한 음악 Vincent에 나오는 Starry Night (별이 빛나는 밤에)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도 했다. 한편 그의 그림이 과장된 게 정말 그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기 때문이라는 몇몇 설명에 다시 한번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생레미에서 그렇게 고흐의 흔적을 더욱 깊게 느끼고, 그 마당과 여러 그림들을 보니 아를보다 이곳이 훨씬 더 인상깊었다고 자부한다. 한편, 아를에서도 몇몇 장소를 내가 간과하고 지나가다 보니 제대로 보지 못했겠거니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한편, 그 수도원에는 슈바이처 박사의 방도 있었는데, 알고 보니 슈바이처 박사가, 이곳에 머물렀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는데, 그가 전쟁포로로 잡혔었기 때문이란다. 참으로 19세기말, 20세기 초는 격동의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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