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길도
이 짧은 한국 체류 기간 중 꼭 가야겠다고 생각할만한 곳은 보길도밖에 없었다. 보길도 하나만을 위해 완도로 향한다. 완도에서 하루를 묵고, 오전 배를 타고 오랜만에 뱃사람의 정취를 느낀다. 가끔씩 하루이틀 정도만 배를 몰아보고 싶단 생각을 다시금 한다.
배에서 내려, 보길도, 윤선도 유적지로 떠난다. 평일 오전, 보길도까지 온 사람이나 있겠냐 싶은데 드라마 촬영 중인지라 분주하다. 한적하게 장소 하나하나를 마음속에 담아두고 싶었는데, 카메라 앵글에 나온다고 비키라고 하여, 열 받아서 관계자에게 들이받았다. 나도 큰 마음 먹고 몇 시간 동안 운전하고 배타고 온 거라고. 매표소에 가서 항의하니, 환불해주겠다고 하여, 환불이 중요한 게 아니라고 하고, 주변 유적지 둘러볼 테니 혹시 촬영 중단하게 되면 알려달라고 이야기했다. 이내 전화가 와서 점심시간이라고 다 떠났다며, 고작 3천원이긴 하지만, 환불 꼭 해주고 싶으시다 하셔서 다시 찾아가니, 한적한 부용정을 마음에 담을 수 있었다.
연못이 끼어있는 부용정은 창덕궁 후원에 있는 부용정과도 비슷한 느낌이다. 창건연도를 따져보니 보길도의 그것이 먼저인데, 윤선도가 만든 걸 참고하지 않았을까 싶으면서도, 그도 경회루를 보고 참고하지 않았을까 싶다.
근처에 함께 있는 낙서재, 곡수당, 산 중턱에 있는 동천석실까지. 해남 윤선도 유적지 녹우당에서 봤었던 그 느낌과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그러고 보면 해남의 달마산, 두륜산의 바위와 지형이 보길도의 그것과 비슷한 느낌인 것도 받는다. 그와 만나보지도 않았지만, 그가 이런 느낌을 좋아하겠거니,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다.
또, 오지였던 이곳에 무려 400년 전에 본인의 아지트를 만들었던 걸 생각해보면 그가 대단한 부자였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해남 윤씨 집안은 오랫동안 소금 사업을 했다고 한다. 그런 그의 배경을 보면, 그는 헝그리 정신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몇몇 사람은 그의 문학을 배부른 부르주아의 사치 정도로 폄하할 수도 있겠지만, 여유가 있으니까 예술이 있는 게 아니냐는 반박도 할 수 있다. 서양에서도 음악과 미술을 누리던 계층은 특권층이었으니까. 그런 덕분에 후대에 우리가 이를 즐길 수 있는 거일 수도 있다.
한편, 그의 삶을 그냥 배부른 부르주아로 그냥 치부해버리기엔 그의 삶은 나름 파란만장하고 본받을만하다. 다음 글을 본다.
“조선 인조 14년(1636)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막강한 청나라 군대는 순식간에 한양 근처까지 쳐들어왔다. 전남 해남 집에 있던 고산은 왕을 돕기 위해 집안 사람들과 노복 수백 명을 태우고 강화도로 진군했다. 하지만 가는 도중에 남한산성에서 무릎을 꿇은 인조가 한강변 삼전도에서 청나라에 항복의 예를 바쳤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는 이 소식 이후, 낙담하여 세상을 등지고 제주도로 가려다가 풍랑을 맞아 보길도에 우연히 도착했는데, 그곳에 눌러앉게 되는 거다. 물론 그 이후에도 여러번 정치적 시도를 하며 유배와 사면을 거듭한다. 부르주아긴 하지만, 세상을 본인의 방식대로 좋게 만들려고 했던 지식인의 책임감도 느낄 수 있다. 좋은 날, 봄이 찾아왔음을, 우리 땅끝에서 느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