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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책과 생각

군대에서의 일화

해군. 나의 정체성

by 송다니엘


생도시절. 사관생도와 사관학교장(3스타)과 간담회 시간. 그 때 당시만 해도, 학사일정이 성탄을 지나고 휴가를 나가는 개념이었는데, 나는 그게 무척 싫었다. 그래서 교장께 당당히 손 들고, 20대 청춘에 성탄을 학교에서 보내는 게 너무 안타깝다며 연인, 가족과 함께 성탄을 보내도록 학사일정을 조정하는 방향으로 건의드린다고 했다. 그 이후로 사관학교는 성탄 전에 시험이 마무리되어 휴가를 갈 수 있게 되었다.


한번은 순항훈련을 눈앞에 두고, 동기 중 한명이 시험 보는 중에 부정행위를 했는데, 같은 시험을 봤던 동기들이 그 동기에게 직접 사실을 보고하라고 기회를 줬었다. 결국 그 동기는 보고하지 않았고, 어떤 경위였는지 이 모든 게 문제가 되어 동기생 전체가 단체훈련을 받게 되었다. 당시 생도대장은 이건 심각한 문제이며, 같은 시험을 봤던 동기들도 명예롭지 못하다며 신랄한 비판을 하며, 모두 한마디씩 하라고 마이크를 돌렸다. 이미 며칠내내 총 들고 연병장 70바퀴를 돌아 녹초가 된 상태에서 거의 졸업을 앞둔 시점에 사건 관련된 동기들 모두 학교를 나가니 마니 하는 상황이었으니 언론의 자유라곤 없는 상황에 나는 동기생에게 마지막 기회를 준 건 명예를 담합한 게 아니라 사관학교 생활을 같이 한 동기에게 정의로운 행동이었다며 생도대장에게 반기를 들었다. 사실 대장님은 당시 별 말 없었으면 그걸로 훈련을 종료하려고 했었는데, 그 이후로 이틀간을 더 뺑뺑이를 돌렸다는 후일담을 전해줬다. 어찌됐든 동기들도 잘했다고 덕담했었다.

첫 근무지,, 소위 시절. 새로 부임한 전단장(1스타)께서 친히 내가 근무하는 함정에 방문했다. 장교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훈화를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사관학교 출신 장교들도 나를 닮아야 한다고 했다. 이는 사관학교 출신 장교들의 경직된 사고방식이 때로는 좋지 않다는 취지의 이야기였는데, 웃긴 건 나도 사관학교 출신이라는 점. 함장이 “단장님, 송소위도 사관학교 출신입니다.”하니, 모두들 그 자리에서 폭소했다. 전단장은 절대 나쁜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게 아니고, 좋은 뜻이라고 이야기했지만, 군대에서 소위가 소위 말해 기합 빠져 보인다는 이야기가 될 수 있으니, 꼭 좋은 건 아니었다.


1년쯤 지나 사석에서 단장님을 따로 만나뵐 기회가 있었다. 당시의 이야기를 말씀드리니, 지금은 의젓해졌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 때 그 이야기는 꼭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단 걸 알게 되었다.


한번은 함대사령관(2스타)와 위관장교와의 간담회 시간이 있었다. 보통 건의하라고 하면, 눈치 보고 건의를 하지 않는 게 간담회 시간이 아닌가. 그렇게 모두 눈치를 보고 있던 와중, 민감한 주제를 먼저 사령관께서 꺼냈다. 사령관께서 먼저 한 선배를 찍어 이야기하라고 했다. 선배는 본인은 부임한지 얼마 안 됐다며, 본인보다 이곳에서 오래 근무해 작전환경을 잘 아는 훌륭한 후배에게 마이크를 넘기겠다고 내게 바톤을 넘겼다. 나는 소신껏 답했는데, 나의 한 마디로 그 이후로 모든 작전 일정이 변경되었다. 새로 모든 일정을 계획해야 하는 중간 관리자들은 식빵을 구우며 야근을 했다. 그래도 그게 누가봐도 합리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군이라는 곳은 그런 큰 외부의 압력 없이는 바뀌지 않으며, 그런 압력이 있는 순간에는 그 어떤 것보다도 빨리 바뀌는 게 참으로 재밌는 조직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장교생활을 시작한 그 때를 생각해보면 나는 미생의 장그래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2년 선배에겐 거의 맞먹으려고 했고, 13년 선배장교의 업무 지시에는 “이걸 내가 왜 해야돼?” 같은 불평불만을 입에 달고 살았으니. 할 일이 정말 많이 없어서 퇴근 시간만 기다리는 날도 많았는데, 함장님과 부서장이 나가기 전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도 너무도 싫었다.


특히 휴가 때문에 꽤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당시 애인과 맞춰놓은 일정에 급작스레 훈련 차출이 되는 상황에서 온갖 핑계를 늘어놓으며 결국 휴가를 갔던 걸 기억해본다. 지금이라면 정말 미친 짓이었지만, 그 때는 그 휴가를 못 가면 죽는 것처럼 생각했으니. 참으로 부끄럽고 감사한 순간들이다.

해군에는 30분, 1시간, 2시간, 24시간 대기태세가 있는데, 이 대기태세의 의미가 30분만에 출항을 할 수 있는 의미라, 30분이라고 30분만에 들어오면 되는 게 아니라, 실질적으로는 5-15분만에 배로 복귀해야 하는 개념이다. 그런 한편 2시간, 24시간은 태세가 있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웬만하면 나갈 일이 없다는 건데, 나는 이때마다 고향을 가거나 멀리 사는 애인을 보러가곤 했다. 가끔은 이런 경우에도 운 안 좋게 나가야하는 경우도 있으니, 상부에 보고하지 않고 가는 건 꽤나 위험부담이 있는 일이다. 그런 한편, 주말마다 놀러간다고 보고하는 것도 눈치보이는 일이라, 주말에 어디 가도 되냐고 눈치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꽤나 아찔한 경험이 있는데, 한번은 금요일 늦게 입항하고, 함장님은 고생했다며 휴가를 보내주기로 했는데, 오늘 가지 말고 그다음날 가라며 회식을 잡아버렸다. 나는 역시 식빵을 구우며, 회식자리에 참가했는데, 일부러 술을 안 먹고 있으니 운전 못 하게 한다고 술을 먹였다. 그 때 그게 얼마나 원망스러웠는지. 그러고 나는 운전을 했을까 안 했을까. 비밀이다.


다음은 이번에는 말 안 하고, 멀리 떠났는데, 예정에 없던 함장님이 번개 모임을 하기로 했다. 중소위 모임에다가 그 당시만 해도 총애를 받고 있던지라, 가지 않을 수 없었는데, 함장님께 시간을 조금만 늦게 하자고 하고, 바로 짐을 챙겨 세시간 넘는 거리를 두시간반만에 주파했던 걸 기억해본다. 말 안 하고 멀리 온 게 들키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은 24시간 대기태세보다도 더 유연한 대기태세였던지라, 당연히 말 안 하고 멀리 떠나있는데, 갑작스레 부두이동을 해야 한다고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함장님, 부장님 등 높으신 분들 모두 대원들이 다른 곳을 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지라, 멀리 있는 사람은 무리해서 오지 말라고 했는데, 그 당시 꼬투리가 잡히기 싫었던 나는 무리해서라도 복귀하기로 했다. 출항까지 두시간 안팎의 시간.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했는데, 출항시간이 조금 늦춰지면서 결국 제 시간에 복귀할 수 있었다. 차는 그때 당시 너무 빨리 달렸던지 엔진에 무리가 되었고, 이후에 수리를 맡기기도 했었다. 운 좋게 안 걸리고 꼬투리 안 잡혔으니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때부터는 이런 모험을 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하곤 했다.


이십대초반. 참으로 혈기왕성하고 철없던 에피소드들이다. 재밌는 건 나만 이런 줄 알았는데, 10년 선배인 부장님도 가끔은 함장님께 이야기 안 하고 멀리 갈 때도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고는 사람 사는 게 다 똑같구나 싶었다.


시간이 지나며, 이런 위험천만하거나 철없던 초급장교의 모습에서 어느 순간 나도 기성 장교의 모습으로 변했다. 이는 좋은 의미도, 나쁜 의미도 있다. 책임이 늘어나는 만큼, 위험부담이 큰 일은 거의 하지 않게 되었던 반면, 후배를 보면서 나는 너보다 훨씬 열심히 했는데 등의 지적을 하곤 했다. 꼰대, 라떼충이 되어간 거다.


이 모든 것도 전역을 결심한 순간부터는 모두 옅여졌다. 어느 순간 내가 일하는 것도 욕먹기 싫어서 혹은 봉급받은 만큼만 하자 등의 생각들로 변했다. 봉급받은만큼이 어느 정도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진짜 필요한 것만 하자 정도가 아니었을까.


마지막으로 군대에서만큼 책을 많이 읽었던 때도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생각보다 남는 시간이 많았으니. 처음엔 교범, 해군작전 등을 공부했다면 어느 정도 알았다고 생각한 순간부터는 그냥 책 읽는 걸 인생공부라 생각하고 여러 책을 탐독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 모든 일화가 나의 인생공부였단 걸 다시금 깨닫는다. 그 인생공부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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