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도시개발 역사를 통해, 서울탄생기
서울탄생기를 읽고, 크게 세 가지의 물음에 대해 고민하고자 한다.
주택, 자동차 중심 체계, 장소성.
먼저 주택, 어디에 살 것인가. 우리 삶을 관통하는 물음이다.
“도시 공간을 경제적 이익 창출, 그중에서도 부동산 투기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태도가 소수의 사람들에게 한정된 것이 아니라 평범한 대다수 사람들에게 확산되었다는 데 있다... 지가 앙등의 신화를 거치면서 사람들은 땅에서 이전과 다른 의미의 기회를, 가능성을, 미래를 따지기 시작했다. 그저 서울에서 살고 교육을 받을 수만 있으면 자신의 자식 세대가 스스로 새로운 미래를 개척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의 시대는 지나갔다. 자식 세대를 바라보기보다 스스로 불로소득을 통해 재산을 일굴 수 있는 기회가 보였다. 부동산이 계급상승의 사다리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교육이 계층 이동의 수단처럼 간주되는 이 사회에서, 뛰어난 학력수준을 만들어내는 교육체게는 강남의 경제적 자본을 세습하고 학력자본과 사회자본을 집중적으로 형성할 수 있는 차별적 수단으로 등장. 고교평준화, 명문학교의 강남이전, 완전학군제로 이어지는 교육제도는 강남의 특권화에 가장 중요한 기반이었다.”
“강남개발로 상징되는 새로운 중심의 형성은, 도시 공간을 거주와 생활의 공간이 아닌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부의 원천을 바라보게 하는 공간적 관점의 변화를 낳았다. 역사와 전통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강남이라는 공간을 넘어, 공간을 바라보는 관점에 일어난 큰 전환을 상징하고, 경제적 공간 감각은 역사적 기억을 소거하는 태도.”
“강남의 부동산 신화는 서울시, 관료, 투기꾼, 중개업자, 주민 모두의 합작품이었다. ’강남 신화‘는 현대 한국 사회의 모든 욕망이 집결될 때 어떤 결과가 나올 수 있는지 보여주는 척도.”
그간 노동을 통해 얻은 소득의 신성함을 생각하며, 흔히 투자라고 부르는 것들에 대해 거리를 둔 내 자신이, 최근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관점으로 토지, 주택을 바라보게 되었다. 이미 많이 늦어버린 탓에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지는 한정적이고, 아직까지도 이것이 도덕적으로 옳은 것인지에 대한 의문도 계속 함께 한다. 그 의문은 법을 어기지 않는다는 것이 도덕적인 것인가, 모든 사람이 다하니까 하지 않는 나만 벼락거지가 되는 것. 집 한 채는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냐는 자기 합리화의 연속이다.
경제개발의 논리, 중산층의 성장 등으로 우리 사회는 판자촌에 사는 철거민 등에게 강제이주, 강제철거와 같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부도덕한 폭력을 묵과해왔다. 이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현실이 한편 천정부지로 오른 주택가격에 대해 끝없이 절망하고 비난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정부는 그린벨트 해제를 통해, 새로운 부지를 찾아 또다시 주택을 건설하고 있다. 얼만큼 그곳에 집중되고, 건설되어야 우리는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 와중에 ’소시민적 아비투스‘를 지닌 개인은 아직까지도 서울에, 혹은 수도권에 주택을 가지지 못해 어떻게든 얻으려 하고, 지금 사지 않으면 평생 사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빈민들이 서울 개발로 인한 판잣집 철거에 저항할 수 없었던 것처럼, 어느 정도 경제력이 있는 사람들도 부동산 투기의 신화에 적극 동참하지 않으면 곧장 신분상승에서 밀려나는 격렬한 계급 분화가 시작되었다.”
두 번째. 자동차 중심의 우리나라.
세계에서 최고로 우수한 교통 시스템을 자부하고 있는 우리나라. 어쩌면 우리나라가 아니라 서울만이 그럴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서울에서도 교통에서 소외되고 있는 지역은 적지 않다. 그리고 흔히 역세권이라고 불리는 지역과 지하철역이 없는 공간의 경제적, 위계적인 차이는 어마어마하다. 서울도 이러한데, 다른 도시는 이루 말할 것도 없다. 내가 살고 있는 도시에선 가까운 거리를 가려고 하여도 수없이 갈아타야 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많다.
탄소 중립, 자전거 중심의 도시, 트램 도입 등을 천명하고 있지만 사실 우리나라에서 자동차 없이 생활하는 것은 정말 어려움이 많다. 이 시작은 어디일까.
“급히 어디론가 가야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를 제쳐놓고 좌석버스란 이름의 입석버스를 타고 수없이 떠났는데도 구보 씨는 차를 잡을 수 없었다. 왜 전차를 없애야 했을까 하고 구보 씨는 생각하였다. 대형 전차를 더 늘리는 것이 이 교통난을 푸는 길이 아니었을까. 또 자동차만 하더라도 택시 대신에 이층버스 같은 것을 만들어 쓴다면 이렇게 거리가 자동차로 꽉 차지는 않을 것이 아닌가. 아니 전차의 대수를 자동차의 몇 분지 일만 늘렸더라면 이 버스와 택시는 없어도 됐을 것이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버스체제로의 이행이 사람 중심이 아닌 자동차 중심의 도시로의 전환을 상징한다. 차들은 고가도로를 질주하고, 반면에 사람들은 불편하게 육교나 지하도의 계단을 오르내려 차도를 건너게 되었다.
자동차 전용도로인 강변도로는 1960년대 후반까지 서민의 친숙한 휴식지였던 한강에 대한 접근성을 빼앗아가, 한강의 조망권은 강변의 아파트를 살 수 있는 경제적 여력이 있는 거주자들의 사유물이 되었다.
자동차 중심체계로 개편된 서울의 도시 공간은 보행자들에게서 거리를 가로지를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하는 한편 자동차의 배기가스와 소음으로 가득 찬 자동차 중심의 공간으로 만들어버렸다. 1971년 상황을 묘사하는 궐은 2000년대 서울에 인용하여도 가능하다.”
이 같은 6~70년대의 변화는 지금 지하철이 생긴 지금에서도 적용되는 말이다. 청계천 고가도로가 사라지고, 차 없는 거리를 도심 곳곳에 도입하긴 했지만 갈 길이 멀다. 꼭 도시에서뿐만 아니라 고속도로 중심의 교통체계, 자가용이 필수적으로 인식되고 있고, 기실 서울에는 KTX 노선이 강릉부터 최근에는 영주, 안동까지도 연결이 되어있지만 서울을 제외한 곳을 생각해볼까. 예를 들어, 부산에서 광주까지 혹은 강릉에서 부산까지, 대전에서 동해까지. 아쉬운 점이 많다.
우리나라 최초의 트램. 사실 트램, 전차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있어왔다. 자동차 중심의 체계를 변하지 않는 트램의 도입의 효과는 미지수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기후변화라는 중대한 위기 앞에 친환경이라는 진정한 의미를 생각해봐야만 하는 시점이다.
마지막 우리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장소에 대한 애착.
“한 장소를 의미 있는 대상으로 만들어주는 ’장소성(placeness)‘의 원천이 그 공간을 이용하고 체험한 개인들의 기억과 의미부여에 있다는 것.”
“세종문화회관을 새로 짓기에 시민회관 부지만으로 생각했던 서울시는, 바로 그 옆에 있던 ‘예총회관’ 건물을 부수었다. 건물의 건축적 가치나 역사적 중요성을 무시하고 파괴하는 일들은 지금도 서울에서 흔하게 일어난다. 특히 세종로 일대는 정치인과 관료들이 서울의 얼굴이자 정치적 상징성을 보여주는 곳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곳이다.”
“1968년 전쟁으로 소실된 광화문이 콘크리트로 복원되고, 같은 해 충무공 이순신 동상도 세종로 한복판에 세워졌다. 이는 1965년 한일협정을 맺은 이후 드높았던 반일의 감정을 무마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1968년 복원한 광화문의 자리가 엉터리이기 때문에 06년 다시 복원하고, 전임시장이 09년에 만든 광화문 광장을 다시 만들겠다는 공약을 내세울 수 있는 곳이 세종로. 전근대 역사의 파괴, 일제 근대건축 유산의 파괴, 우리가 직접 만든 현대사 건축의 파괴가 연이어 일어나는 관행은 이미 1960년대 후반 만들어진 것이다.”
과연 광화문광장이 바뀌어야 하는가. 애초에 바꿀 것이었다면 처음 만들 때부터 그럴 수는 없었을까. 우리에겐 유럽과 같은 수백년 된 광장을 바랄 수는 없는 일일까.
천년 넘게 된 절, 그리고 절 터, 하다 못해 경복궁까지. 선조들의 안목과 비교하면 너무나도 미약하고 단순히 효율, 발전만을 추구하는 물질문명에 대한 안타까움이 든다.
애초에 바꿀 것이었다면, 광화문 광장만이라도 차 없는 공간이 될 수는 없었는가.
한편, 내가 느끼고 있는 서울에서 제일 한국적이라고 생각하고, 가슴 뜨겁고 수많은 추억을 가진 곳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구국의 영웅이자 내가 이곳을 오게까지 하는 수많은 상징물이라 생각했던 건축물은 이렇게 생겼다. 만감이 교차한다.
“66년 경제성장과 도시개발이 시작된 이후 서울 사람이 기본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바로 항상적인 변화 그 자체였다. 이 도시가 언제나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서울에 사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태도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장소나 건축조차 마구잡이로 사라지는 도시 서울에서, 특정장소를 둘러싼 과거의 기억이 역사적 사건과 무관해 보이는 작은 개인들의 역사와 체험에 한정되어 있는 공간의 장소성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매일같이 일어나는 장소의 지속적인 파괴와 망각은 서울이라는 도시의 근본적인 속성이 되었다.”
이 모든 걸 생각해본다. 앞으로 서울,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하는 방향은 어떠할까. 이제는 짧게는 5년, 길게는 50년, 100년도 내다보는 정책을 펼쳐야 6~70년대, 그동안의 과오를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과오가 아니라 그때 당시에 잘한 정책만큼도 못한다면 유감이다.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서울 시민도 아닌 내가 판단하고, 대안을 제시할 입장은 되지 못한다. 다만 작게는 서울, 크게는 우리나라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고민해보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