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인 인연의 끈
80년대 후반. 정치적으로는 어렵게 쟁취한 민주화가 젊은 세대의 바람과 다른 결과를 낳았고, 한편 88서울올림픽과 같이 우리나라의 국운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있었을 그 시대. 지금으로부터 30년이 조금 지난 시점이다. 부모님은 그 시절 나의 나이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 초년생. 당시엔 결혼을 지금보단 훨씬 일찍 했고, 물론 당시에도 취직이 쉬운 건 아니었다곤 하지만 경제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시기였기에 일자리는 상대적으로 많았고, 앞으로 살아갈 사회는 지금보다는 나아질 것이고, 10년 후, 20년 후는 지금보다 더 나은 사회가 될 것이라 희망이 부풀던 시절이 아니었겠는가.
80년대 후반 신촌으로 돌아가본다.
지금도 건재한 신촌의 다방. 음악을 스트리밍으로 듣던 지금과는 달리, 휴대용 음악기기라곤 워크맨이 유일하던 시절. 다방은 그 당시 핫플이었다. 그곳에는 당시 최고의 DJ가 있었는데, 영어를 한 자도 몰랐지만, 음악으로 영어를 배워서인지 음악 가사는 술술 외울 수 있었다고 한다. 또 음악에 대한 깊이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또 다른 인물. 다방의 알바생 대학생과 다방의 단골손님은 안면을 텄다.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DJ는 알바생의 언니와 단골손님을 소개해주려고 마음먹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알바생은 단골손님에 대해서 이성으로서 호감은 느끼지 못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다방은 계속 번창하고, DJ의 명성은 당시 대단했는데 덕분에 새로운 가게도 차리게 되었다. 당시 단골손님은 과외 선생으로 명성을 떨칠 때인지라, 가게가 열 때 힘도 꽤나 썼다고 한다. 무튼. 그런 인연이 결국 이어져 3년간의 열애 끝에 단골손님과 알바생의 언니. 두 사람은 결혼하게 된다.
그래. DJ는 제외하고, 세 명의 등장인물은 나의 부모님과 이모다. 오랜 시간이 지나 이 이야기를 들으니 아주 흥미롭고, 나머지 등장인물이 춘천 소양강 자락의 유명한 카페의 디스크쟈키를 하고 있다는 소식에 호기심에 어머니와 방문했다. 그만두었는지, 안 계셨다. 아쉽게 되었지만 언젠가는 30년 전 단골손님이 방문한다고 하셨으니, 지난날의 회포를 푸려나 모르겠다.
그리고 또다른 등장인물인 이모의 집에서 30년도 넘은 LP를 꺼내봤다. 나는 어차피 20년 가까이 안 들은 거면 앞으로 20년도 안 들을 거라고 내게 다 줄 것을 요청했으나, 원하는 모든 음악을 가져오진 못했다. 그래도 20장에 가까이 가져왔는데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음악은 잘 나온다. 이는 DJ 선생이 아끼는 레코드였다고 하니, 이만큼 역사적인 물건도 없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나저나 DJ 선생이 좋아했던 음악이 아버지 지금의 취향과 비슷한 걸 보면 30년 넘게 끊긴 인연이지만 서로 통하는 데가 분명 있었다는 확신이 혼자 든다. 아버지는 이 음악을 들으면 옛날 생각이 났을 거다. 처음엔 턴테이블을 왜 사냐고 다그쳤지만, 막상 사고 나니 제일 좋아하신다.
왜 그 인연이 끊어질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해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다방에서 다음날 아침까지 술 마시는 일상이 생계를 꾸려가는 것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게 근본적인 이유였다는 후일담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