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야기 II

유적지 답사: 여수, 남해, 통영, 고금도, 명량, 진도

by 송다니엘

충무공. 그 두 번째 이야기.

난중일기를 읽고 그 역사적 현장에 하나하나 가봤다.


먼저, 여수.


적지 않은 횟수 동안 여수를 지나며 그동안은 무심했던 충무공 유적들에 강하게 이끌려 차를 돌리고 관람했다. 그 이름은 진남관. 진해에 있는 해군 숙소 이름이다. 사실 별생각 없었다. 국보라니 오호라. 올라가보니 웬걸. 충무공께서 전역한 내가 괘씸했는지 공사 중이다.


발길을 돌리려던 찰나, 조그맣게 조성된 박물관에 들렀다. 전라좌수영이자 통제영이었던 여수의 역사와 충무공, 해전에 관한 설명들.


갑자기 의문점이 생겨 혼자 고민해본다.

‘한산도를 통제영으로 삼은 것은, 그곳을 지금의 제주처럼 기동전단, 전진기지로 삼고, 여수는 지금의 진해처럼 후방기지로써 군수와 예비전력이 대기하던 장소가 아니었을까.’

어쩌면 생도시절 수업 혹은 초빙강연 때 열심히 들었다면, 혹 수업에 없더라도 교수님께 다 여쭤보면 될 일, 혹은 잘 찾아보면 될 일을 이제 와서 관심 가지는 내 스스로 모습에 모든 게 때가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때는 뭐가 그렇게 다 싫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이제야 깨달은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싶은 오묘한 감정이 뒤섞인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 남해로 떠났다.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의 장소인 남해 이순신 순국공원부터. 여수, 광양에서 바다를 볼 때와 남해에서 보는 것은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이 앞바다에서 임진왜란 최후의, 최대 격전이 벌어졌다.


어쩐지 익숙하다고 느꼈던 이곳은 지금으로부터 거의 8년 전에 행군길로 왔던 곳이다. 당시에 원하지 않는 길이어서였을까. 그 기억을 다시 끄집어내는 것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다. 그리고 지나고 나서야 수많은 일의 가치를 뒤늦게 깨닫는다. 너무나도 힘든 순간들은 그때 당시에는 너무나도 괴로웠지만, 지금은 좋았던 것만 기억하게 된다. 그때는 왜 남해에서 좋은 경치를 보고 충무공 유적을 보고도 어떠한 감흥이 일지 않았는가. 하면서도 자발적인 것과 강제적인 것의 큰 차이를 느껴본다. 그리고 하나 더, 단체로 다닐 때 그 어떠한 감정도 일지 않았던 곳이 개인적으로는 엄청난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


모든 게 상대적이다.





다음 행선지는 통영, 3년 반 만에 왔다. 근무하던 함정의 이름이기도 했다.


학교 들어가고 얼마 안 돼서부터 여러번 방문, 참배했던 통영 충렬사부터 세병관까지. 사실 충렬사라는 장소는 우리나라에 적지 않게 있다. 부산, 남해, 강화, 정읍 등등. 그중에 가본 곳이라곤 통영과 남해밖에 없지만 그중에서 통영의 건축물이 내게 와닿는 건, 입교식 직전에 단체로 처음 왔으니, 나의 9년간의 삶이 시작된 장소라고도 할 수 있으니까.


세병관은 말 그대로 병기를 씻는다는 뜻으로, 삼도수군통제영. 지금의 해군본부 건물로 사용되었다. 이 이름을 따서 해군사관학교에서는 생도들이 머무는 공간의 이름으로 따서 쓰고 있다. 여수의 진남관과 함께 더불어 남해에 몇 안 남아있는 조선시대의 건축물로 국보다.

통영은 한려수도해상공원의 중심지에 걸맞게 배를 타고 갈 수 있는 섬이 많다. 통영의 진짜 여행은 섬을 들어가는 것이라고 누군가가 말해줬던 것을 기억해본다. 감명 깊은 드라마를 보고 연화도를 갔던 것을 이후로, 여객선터미널에서 배를 타고 한산도로 가본다.


아무도 없는 혼자, 새소리와 파도소리, 봄내음을 호젓하게 느꼈던 한산도 제승당에서 보낸 값진 시간을 뒤돌아본다. 그동안 나의 삶을 되돌아보는 것은 물론이고, 앞으로의 삶의 방향성도 다시 설정해보는 그런 기회.


내가 근무하던 함정에 있는 조그만 도서관의 이름이던 운주당. 지혜로 계획을 세운다는 집의 뜻인 운주당(運籌堂)의 다른 이름은 제승당(制勝當). 과도한 의미부여일 수도 있지만 많은 것이 연결되어 있다.

여수, 남해, 통영, 한산도, 그리고 거제까지. 매번 반강제적으로 왔기에 잘 쳐다보지도 않던 장소. 떠나고 보니 그곳에서의 추억이 다 아름답고 내 뿌리에 대해 자랑스럽고 감사한 마음이 절로 든다.


심지어 그땐 힘들다고 욕하던 행군길이 충무공 유적 혹은 백의종군 길이니, 충무공의 후예라는 말에 콧방귀를 뀌곤 했지만, 그 취지에 이제야 공감하고 느낀다.


한산도에서 통영으로 발길을 돌리려던 찰나, 매년 해군사관생도들이 충무공을 참배한다는 안내문을 보고, 행군길부터, 매년 4월 28일 충무공 탄신일 행사까지 수많은 충무공 관련된 일들에 나는 그 당사자였음에도 과연 얼마나 경건한 마음으로 임했는가 반성해본다.


끝으로, 재밌는 건 동기생이 한산도에 있다고 하니까 지금 전역했는데 왜 배에 있냐고 물어본다.


‘한산도함이 새로 생겼지’ 하고 뒤늦게 생각해본다. 진짜 한산도에 있었으니, 고생하는 동기들에게 미안하면서도 고맙다.



다음은 고금도.



명량 이후, 궤멸한 수군을 재정비하여 다시 진을 옮긴 고금도. 충무공이 고금도로 기지를 옮겼을 때 상부에 보고한 내용이다.


“우리 수군은 멀리 나주의 보화도에 있어서 낙안과 흥양 등의 일본군이 멋대로 다녀 매우 통분합니다. 온화한 바람이 부니 바로 흉적들이 발동할 때이므로 2월 16일에 배를 몰아 17일에 강진의 고금도로 진을 옮겼습니다. 고금도가 호남 좌우도에 있어서 안팎의 바다를 제어할 수 있고 산봉우리가 중첩되고 망보는 것이 연이어 있어서 형세의 빼어남이 한산도 보다 배나 됩니다.” - 선조실록


실제로 고금도에는 노량해전 때 전사한 충무공을 80일간 모셨던 가묘, 월송대가 남아있고, 충무공을 기리는 사당도 있다.

실제로 보아도 들어오려면 꽤 많은 섬, 장애물을 지나야 하기에 방어하는 기지로서 손색이 없고, 위치 또한 서해에 다소 치우친 해남보다 전략적으로 적의 기동을 저지할 수 있는 위치임에 분명하다.


지금으로 따지면 해군의 모항인 진해와 같은 안정적인 기지이자, 더 뻗어나갈 수 있는 제주와 같은 역할을 동시에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해본다.




다음은 해남, 진도의 충무공의 유적.


다른 전투는 몰라도 ”실로 천행한 일이었다.“고 표현할만큼 대단한 충무공도 확신을 갖지 못했던 명량해전. 그랬기에 그의 위대함을 더욱 생각해본다. 이토록 유서 깊은 곳에, 큰 다리가 설치되고, 앞으로 케이블카까지 생긴다는 것이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다.


추가로, 해남의 명량대첩비, 명량해전 당시 진을 설치했던 진도 벽파정에도 가보았다. 진도 벽파정, 이곳에서, 12척의 배로 적을 상대하기 위해 좁은 수로에서 결전을 생각한 충무공의 혜안에 감탄한다. 현대 해군 전술로 치면 현존함대 전략의 진수다.


택리지엔 아래와 같은 설명이 있다.

”물길로 30일 떨어진 벽파정은 실로 중요한 길목이다. 물속의 석맥이 삼주원에서 벽파정에 이르기까지 마치 들보처럼 가로지르고 있는데, 석맥의 위아래가 마치 계단처럼 끊겨있다. 바닷물이 여기에 이르러 밤낮으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데, 마치 폭포수가 쏟아지는 것처럼 물살이 매우 급하다.“

다음은 해남의 명량대첩비에 대한 설명이다.

“1942년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으로 강제철거되어 일제 시대 때 경복궁 근정전 근처에 버려졌으나, 1950년 우수영지역 유지들이 뜻을 모아 비를 옮겨 세웠다.”


일제는 400년 전, 본인들을 완전히 박살 낸 충무공이 죽도록 미웠나 보다.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큰 울림이 될 수 있는지.

의미 있는 답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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