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액체를 토하는 할머니
수년 전부터 할머니는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마다 유언을 하시는 듯이 ‘건강하게만 살아라’, '너희 둘(나와 남편)만 의지하고 살면 된다', ‘나는 이제 다 된 것 같으니, 너무 나를 붙잡으려고 하지 말고 보내라’ 그런 말들을 하셨다. 할머니의 컨디션은 좋지 않아 보였지만 그때마다 할머니가 바로 떠나실 만큼의 컨디션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믿고 싶었기 때문에 애써 웃으며…어~어~하고 넘겼다. 물론 그중에 서너 번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훌쩍훌쩍 눈물을 흘리기도 하긴 했지만….
그러다 지난 6월 첫날, 올케의 생일 겸 가족식사를 하려고 친정에 모였는데 할머니가 속이 안 좋아서 식사를 못하신다고 한다. 그 2주 전에 만났을 때만 해도 괜찮으셨기 때문에 또 그냥 컨디션이 안 좋으신가 보다 했다. 그러고 웃으며 들어간 할머니 집(할머니와 부모님은 위아래층에 살고 계신다)에 누워있는 할머니의 모습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근 20년 전 대영박물관에서 보았던 미라가 생각날 만큼 말라있는 할머니 모습에 보자마자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고 했다. 나보다 먼저 도착한 조카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고는 펑펑 울었다고 한다. 아마 10살 아이에게 할머니의 모습은 생각보다 더 많이 무서웠을 것 같다.
눈물이 터지려는 것을 겨우 꾹 참고 무슨 일인지 확인해 보니, 일주일 정도 전부터 계속 토하시고 뭘 드시지 못하고 계시다고 했다. 그냥 체하셨다며 약이나 먹고 죽이나 먹고 하고 있었는데 오늘은 약마저도 다 토하고 힘들다고 하셨다. 병원으로 모셔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의견을 드렸지만 할머니가 병원 안 가도 금방 나을 거라며 거부하셨다고 한다. 하긴 할머니는 이미 심장, 신장, 소화기, 순환기 등 모든 과를 한번 이상씩 거치며 심장 스텐트 시술, 신우염 등등으로 응급실과 중환자실, 수술실을 돌았었고 그래서 매일 먹고 있는 약만 산더미였다. 병원을 그렇게 주기적으로 다니는데 또 병원을 가기는 싫으신 것,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리고 그동안에도 할머니는 속이 안 좋아 일주일 이상 식사를 부담스러워하시면서 잘 못 드시다가 어느 정도 지나고 나면 다시 식사를 하셨고 그러면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 힘이 생겨서 혼자 마실을 다니곤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번에도 며칠 지나면 할머니가 괜찮아지시겠지.. 하고 걱정은 되었지만 조금 가볍게 생각하고 넘어갔던 것 같다.
하지만 그날 밤 우리가 집으로 모두 돌아온 후, 할머니의 토에 음식물이나 물이 아닌 검은 액체와 덩어리가 섞여 나온다는 엄마의 전화가 왔다. 출혈이 있는 것 아닌가 의심이 되었고, 가족들과 얘기를 나눠 할머니를 병원으로 모시고 가기로 했다. 부모님이 119를 불러 응급실로 움직였는데, 의대정원 증원 이슈로 인하여 의료 공백이 있는 시기여서 할머니가 원래 다니던 병원은 응급실 접수가 불가한 상황이라 다른 대학병원으로 옮겨졌다. 응급실에서는 기본적으로 하는 모든 검사를 순서대로 진행하는 것 같았고 시간이 참으로 더디고 더디게 흘러갔다. 어차피 병원 안에는 보호자 1명만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다른 가족들은 집에서 소식을 공유하며 걱정하고 있었다.
오랜 검사 후 의료진은 예측한 대로 위장 내 출혈을 의심하고 있었고 확인을 위한 위내시경을 제안했다. 여기서 한 가지 결정이 필요했다. 할머니가 연세가 많아 내시경을 하다가 쇼크가 올 수 있는데, 이 경우 심폐소생술을 할지 말지. 심폐소생술을 하게 되는 경우에는 연세와 골다공증 병력이 있기 때문에 갈비뼈 골절로 인한 2차 우려가 있을 수는 있다고 했다. 반면에 하지 않게 되는 경우에는 즉시 사망하실 수도 있다는 거였다. 이건 우리 가족들에게는 그나마 쉬운 결정이었다. 우리는 심폐소생술은 거부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수십 년을 골다공증으로 고생하셔서 뼈가 약할 대로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갈비뼈는 골절이 될 거였고 그럴 경우에는 할머니에게 더 큰 고통을 드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랬더니 의사의 제안이 덧붙여진다. 그럴 경우 쇼크가 오면 얘기한 대로 바로 사망하실 수도 있기 때문에 가능한 가족분들이 가까이 와 계시면 좋을 것 같다고. 월요일 아침 출근을 했다가 급하게 반차를 내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우리 모두 병원 응급실 대기실에 모여 앉아 걱정을 나누었다. 할머니 연세에는 내시경 하나도 이렇게 긴박한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으며...
그렇게 할머니의 위장내시경이 시작되었다.
***
할머니는 병원에 입원하는 것을 정말 싫어하셨다. 이런저런 검사하는 것도 귀찮고 무섭고 아프겠지만, 할머니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 맛없는 식사였다. 환자식으로 나오는 밥이니 간도 약하고 매콤하지도 않아 짭짤하고 매콤한 것을 좋아하는 할머니에게 병원밥은 '맛 때가리' 없는 밥이었다. 그래서 죽이 나올 때면 같이 나오는 간장을 죽에 들이부어 드시곤 했고, 죽이 아닌 밥인 경우에는 엄마에게 간장이나 소금을 좀 사 와서 달라고 하셨다.
비단 병원에서 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집에서 식사를 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엄마의 음식은 예전부터 간이 슴슴했다. 그래서 명절 때 며느님들끼리 음식을 하다가 큰 엄마가 우리 엄마에게 간을 보라고 한 후에 엄마가 적당하다고 하면 큰 엄마는 소금이나 간장을 휙~더 두르셨었다. 그랬던 우리 엄마도 70이 넘으면서 음식이 많이 짜져서 우리는 엄마집에서 밥을 먹을 때마다 '엄마, 짜~'를 연발하곤 했다. 근데 할머니는 그 음식을 드시면서도 싱겁다고 계속 소금을 더 쳐 달라고 말씀하셨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 할머니는 고혈압도 있고 신장도 건강하지 않으니까 간을 약하게 드셔야 해~~' 하고 말하면 할머니는 항상 우리가 대꾸할 수 없이 받아쳤다.
"야! 100살이 가까워오는데 내가 먹고 싶은 대로도 못 먹냐?"
인. 정.
그래서 '할머니 드시고 싶은 대로 드셔!' 했는데, 그러면 안 되었던 것인가 살짝 후회가 되기도 하면서 그렇다고 100살 가까이 된 할머니가 음식을 맛없게 드시게 하는 것이 맞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어쨌든 그렇게 짜고 매콤한 음식을 좋아하던 우리 할머니는 중간중간 몸이 안 좋아서, 혹은 입맛이 쓰다며, 먹고 싶은 것이 없다며 음식을 잘 못 드시는 기간들이 있기는 했지만, 연세에 비하면 특별히 못 드시는 음식 없이 틀니를 앞세워 잘 씹고 뜯고 맛보는 식이생활을 하고 계셨었다.
할머니 간병 중 보호자 식사가 나왔다. 엄마도 보호자식이 너무 싱거워서 맛없다고 하시지만 아직 슴슴한 입맛의 나에게는 딱 맞는 간의 식사라 아프고 못 먹는 할머니를 앞에 두어 너무 죄송하지만, 남김없이 싹싹 비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