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와 국적을 넘어 만난 같은 마음

구분하지 않는 가르침

by sun

체육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들의 국적은 늘 일정하지 않았다.

한국어가 유창한 사람도 있었고,

간단한 인사조차 더듬거리며 꺼내는 사람도 있었다.

처음 그들을 마주했을 때,

나는 무의식적으로 ‘가르침’의 난이도를 계산했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 설명은 길어지고,

설명이 길어지면 오해는 늘어난다.

그건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래서 초반에는 조심스러웠다.

단어를 고르고, 손짓을 섞고,

몸으로 시범을 보이며 최대한 간결하게 전달하려 애썼다.

그러나 아무리 신중해도

언어가 닿지 않는 부분은 반드시 남았다.

그 틈에서 서로는 종종 멈췄고,

그 멈춤은 어색함으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그들은 체육관에 들어왔다.

서양인부터 동양인과 유럽인, 먼 아프리카대륙에서

건너온 관원들도 있었다.

매번 같은 시간에 문을 열고,

같은 공간에서 몸을 풀고,

같은 순서로 훈련을 시작했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설명이 완벽하지 않아도

그 자리에 서는 일만큼은 꾸준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입관한다’는 행위의 무게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이곳에 들어온다는 건

단순히 운동을 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시간을 내어

무언가를 배우겠다는 결심에 가깝다는 사실을.


언어는 달랐지만

그 결심의 결은 놀라울 만큼 같았다.

눈빛은 비슷했고,

훈련이 힘들어질수록 숨이 거칠어지는 모습도 같았다.

실수했을 때 고개를 숙이는 각도마저

서로 닮아 있었다.


문화의 차이는 분명 존재했다.

어떤 이는 질문을 바로 던졌고,

어떤 이는 끝까지 참고 있다가

훈련이 끝난 뒤에야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어떤 이는 감정을 드러내는 데 익숙했고,

어떤 이는 속을 쉽게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쌓이자

그 차이들은 표면으로 밀려났다.


남은 것은 단 하나였다.

각자의 방식으로 목표를 견디고 있다는 사실.


가르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기술보다 사람이 먼저 보이기 시작한다.

자세의 각도보다

오늘 그 사람이 어떤 하루를 건너왔는지가 먼저 읽힌다.

말을 잘 알아듣는지보다

끝까지 남아 있는지가 더 중요해진다.

그 지점에 이르면

국적은 더 이상 판단의 기준이 되지 않는다.


외국인 관원 중 한 사람은

훈련이 끝난 뒤 자주 혼자 남아 있었다.

말은 많지 않았지만

매번 마지막까지 동작을 반복했다.

어느 날, 짧은 영어로 그가 말했다.

“여기서는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 말은 오래 남았다.


그에게 이곳은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공간이 아니라,

그냥 노력해도 되는 장소였다.

말이 부족해도

배경을 설명하지 않아도

땀 흘리는 시간만큼은 정직하게 남는 곳.

그 사실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그를 가르치며

가르침이란 결국 언어를 전달하는 일이 아니라

신뢰를 쌓는 일이라는 걸 배웠다.

이 사람이 나를 믿고 몸을 맡길 수 있는지,

내가 이 사람의 속도를 존중하는지.

그 신뢰 앞에서는 국적도, 문화도 결코 앞자리에 설 수 없었다.


그들과 함께한 시간은

그 오래된 문장을 현실로 데려왔다.

설명이 짧아질수록

훈련은 깊어졌고,

말이 줄어들수록

서로의 상태를 더 잘 읽게 되었다.


그들은 나에게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이

얼마나 쉽게 만들어지는지를 보여주었고,

동시에 그 기준이 얼마나 허약한지도 보여주었다.

같은 목표를 향해 서 있으면

차이는 결국 주변으로 밀려난다.

남는 것은 오늘을 버텼는가?

내일도 다시 올 수 있는가?

그 두 가지뿐이다.


그때부터 나는 체육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을 볼 때

국적을 묻지 않았다.

말투를 먼저 판단하지도 않았다.

대신 그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이곳에 들어왔는지를 본다.

그 마음은 어느 나라에서 왔든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이미 여러 번 확인했기 때문이다.


가르치며 배운다는 건

위에서 내려다보는 일이 아니다.

같은 바닥에 서서

각자의 속도를 지켜보는 일이다.

그 바닥 위에서는

국적도, 언어도 결국 부차적인 것이 된다.


말은 달랐지만, 뜻은 같았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나는 사람을 가르친다기보다 사람을 배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