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가지 프로젝트로 바빠서 밤 늦게나 올 것 같다던 남편님이 비가 많이 와서 회의가 취소되었다며, 집으로 바로 들어온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왔다.
마침 불금이고, 밖에 나가서 맛있는 저녁을 먹고 싶었지만, 비가 억수로 오는 날 차를 타고 밖에 나가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인 듯하여 맛있는 걸 시켜먹자고 제안했다.
남편님은 그럼 알아서 시키라고 했다. 금요일이고 저녁시간이라 기본이 한 시간은 걸릴 듯하여 뭘 시킬까 고민고민 하다가 족발+보쌈 세트를 주문했다.
주문한 시간은 6시 7분.
잠시후 요** 앱에서 카톡이 왔다.
[주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객님의 소중한 주문이 정상 접수되어, 50분 내외로 도착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앱에서는 7시 도착 예정이라는 알림이 떴다.
족보세트를 주문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님이 집에 도착했다. 그리고 불금이기에(!) 평소에 아이들에게 보여주지 않던 TV를 켰다. 세 아이들과 남편. 넷이 주르르 소파에 앉아 런닝맨을 신나게 보고 있었고, 나는 일간 이슬아의 마지막 부분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7시가 되어도 주문한 음식은 도착하지 않았다.
집에 들어오면서부터 배가 고프다고 했던 남편님이 물었다.
몇시에 온댔지?
7시 도착 예정이라고 했는데...
전화해볼까?
아니야.
비도 많이 오는데.
비때문에 늦어지나보지...
갑자기 물폭탄이 쏟아지면서 여기 저기 침수피해가 생긴다는 뉴스가 뜨고 있었고, 재난 안전문자가 계속 도착하고 있었다.
그래.
위험하게 빨리 오면 안 되니깐.
하지만, 7시 30분이 넘어도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는 족보세트는 도착하지 않았다.
안되겠다. 전화를 했다.
그런데, 전화를 받는 남자분의 태도가 영 거시기 했다.
네~
저기.
저희가 6시에 주문을 했는데
언제 도착할까요?
어디실까요?
어디냐고 묻는 말투도 굉장히 퉁명스러워서 덩달아 화가 나려고 했지만, 정신없이 바쁘다보면 그럴수도 있지, 하면서 말을 이어갔다.
00동인데요.
잠깐만 기다리라던 족보집 직원(인지 사장인지)은, 다시 말했다.
저희쪽엔 00동에서 주문한 내역이 없는데요.
네? 저희는 분명히 6시 7분에 결재가 되었고,
7시 도착예정이라고 떠있는데요!
전화번호좀 알려주세요.
문자로 캡쳐해서 보내드릴게요.
주문한 내역을 캡쳐해서 문자를 보냈더니, 그쪽에서도 앱에 들어온 주문내역을 찍은 사진이 왔다.
우리가 주문한 시간대에는 주문이 없었다. 이 사람들이 우리 주문을 놓쳐서 일부러 삭제한 건지, 정말 시스템 상의 오류로 우리가 주문한 내용이 가게로 전송이 안 된건지는 모르겠다.
다시 전화가 왔다.
사진 보셨죠?
저흰 주문이 안 들어왔어요.
아니.
저흰, 결재까지 끝나고,
지금 두시간 가까이
기다리고 있는데요.
그럼 어떻게 할까요?
짜증이 섞인 "어떻게 할까요"라는 말에 나는 화가 나고 말았다.
뭘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그건 내가 물어야 하는 말이 아닌가?
어떻게 하긴요.
보내주셔야죠.
직원은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툭 끊었다.
자신들이 접수를 받지 않았더라도 우리가 결재한 내용, 언제 도착한다는 내용까지 캡쳐해서 보냈으면, 어쨌든 오래 기다려서 속상하셨겠다, 하지만 우리도 잘 모르는 상황이다. 죄송하다. 하는 말이 먼저 나왔어야 하지 않았을까?
설혹, 정말로 접수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그건 요**와 처리해야 할 문제가 아니었던가?
주문완료 시간 6시 7분.
그리고 다시 전화해서 보내 달라고 한 시간은 7시 47분.
배에선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아이들과 함께 TV를 보던 남편님의 얼굴은 잿빛으로 변해갔다.
8시 15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아이들도 배고프다며 도대체 언제 오냐며 보채기 시작했다.
불편한 마음에 나는 수저를 놓기 시작했다.
수저를 놓는 나를 보고 남편님은,
도착했대?
하고 물었다.
아니.
오자마자 먹으려고 셋팅 중.
하지만 8시 30분이 되어도 족보세트는 도착하지 않았다.
아우!
누가 족발먹자고 했어!
남편님이 배고픔에 지쳐 폭발했다.
저녁 하기도 귀찮고, 맛있는 걸 먹고싶어 주문했던 나는 괜시리 죄인이 되어 좌불안석이었다.
전화해 볼게.
아까 전화했던 사람인데요.
언제 배달 될까요?
한결같이 퉁명스럽고 짜증기 어린 목소리이 직원은, 배달 출발했다고 말했다.
그 말을 한 시각은 8시 38분.
수저만 놓인 테이블에 둘러앉아 TV를 보면서도 모두의 귀는 비내리는 밖으로 쫑긋 솟아있었다. 연구실에서 햇반으로 대충 점심을 때운 남편님은 배고픔과 짜증으로 이미 말을 잃었다.
화내는 일이 거의 없는 남편님이 화가 나 있으니, 나는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 되어 이놈의 족발..후기를 아주 그냥 최악으로 써서 남기겠다며 오버해서 화를 냈다.
드.디.어.
문제의 족보세트가 도착했다.
8시 55분.
따뜻함을 유지해준다는 핫팩은 이미 식은채로 족발 위에 살포시 얹혀져 있었고, 순대는 딱딱하고 차갑게 굳어있었다.
아무리 봐도, 배달을 빼먹어버린 느낌적인 느낌이 고개를 갸우뚱하게 했으나...이왕 이렇게 된 거, 맛있게라도 먹어야지! 하며 테이블 앞에 둘러앉았다.
족발과 보쌈이 펼쳐진 테이블을 바라보는데 마음이 여러모로 복잡했다.
이것 좀 먹어보겠다고 3시간이나 기다린 건가.
귀찮아도 콩나물 국 좀 끓이고, 제육볶음 한가지 간단하게 해서 밥 먹을 걸. 이게 뭔가. 싶기도 하고.
내 앞으로 이 집에서 두번 다시 시키나 봐라! 하는 생각도 들고 말이다.
앞으로 여기에서 절대 안 시킬 거얏!!!
포장지를 뜯으며 말하자, 첫째씨가 말했다.
엄마.
그래도,
족발은 여기가 제일 맛있어요.
저는 여기가 짱!
그래도!
흥!
그런데.
내 눈에 들어온 포장지 하나.
바로, 새김치였다. (참고로 나는 새김치엔 사족을 못쓴다.)
일단, 뭐. 색깔은 그럴싸했다.
김치를 집어 입에 넣는 순간!
어?
김치는 맛있네!!!
내 말에 남편과 아이들은 킥킥거렸다.
족보세트를 열심히 먹고 있는데, 광주에 비 많이 온다는데 괜찮냐며 동서에게 전화가 왔다. 3시간만에 배달받은 족발을 먹는다는 내말에, 야식으로 치킨 먹으려고 하는 시간에 저녁을 먹냐며 동서는 깔깔거렸다.
'그러게. 밥 대충 해결하고, 야식으로나 먹을걸.'
족보세트를 다 먹고나니 남편님이 말했다.
아..속이 별로다.
라면 있어?
아니.
먹을 만한 거 있어?
없는데?
아...난,
이걸론 밥이 안 돼.
족발과 보쌈으로 밥이 안 되다니!
신혼 초, 배달된 피자가 저녁이라고 해서 나를 놀래켰던 그가!
당시(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치킨과 피자는 간식이나 야식이지 절대로(!) 밥 대용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내게, 그런 충격을 안겨주었던 그가 10년 넘게 나와 살면서 나를 닮아버리고 만 것이다.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내 말에, 남편님은 세상 슬픈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말했다.
누가 족발 먹자고 했어!!!
두번째로 던진 이 말에, 나도 모르게 짜증이 나서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그랬다. 내가. 알아서 시키라고 할 때는 언제고!'
내 눈에 눈물이 도는 것을 알아챈 남편님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 살짝 나오다 만 눈물을 닦고, 가디건을 걸쳐입고 핸드폰과 지갑을 챙겨들고 현관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가는 나를 보고 놀란 아이들은,
엄마 어디가요?
하고 물었고,
남편님은,
야! 엄마 따라가~!
라고 했지만,
나는 가치돋친 말로,
따라오지맛!!!!!
하고서는, 문을 쾅! 닫고. 비내리는 거리로 씩씩거리며 나와버렸다.
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