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추워서 신이 난다. 외출할 때 내복에 장갑, 목도리, 긴 코트까지 다 챙겨 입고 나가니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남도에 살 때는 이렇게 옷을 껴입어야 할 정도로 추운 날이 별로 없어 겨울이 시시했다.
며칠 전 잠 못 들고 핸드폰 잡고 뒤척이다가 우연히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예약했다. 낮에 보니 다 매진이던데 어쩌려고 그 시간에 반환된 표가 하나 생겼다. 누군가 나처럼 잠 못 들던 사람이 마음을 바꿨던 덕분일까? 이상하게 마음이 설레었다. 뭔가를 기다리며 설레어보기는 실로 오랜만이다. 사람들과의 약속, 모임, 행사들 수없이 많았지만 설렘을 주는 것은 별로 없었는데 이 연극은 묘하게 설렜다. 예술의 전당이나 롯데홀 같은 곳과는 달리국립극장이 주는오래된 고적함 때문일까. 아침에 해야 할 일들을 빛의 속도로 해나가며 오롯이 연극 보러 가는 일 하나만 남겨놓고 집을 나섰다. 추위에 몸을 웅크리고 지나가는 행인들 속에 긴 코트를 입고 목도리를 두른 나만 신이 났다.
서울이 아직도 낯선 터라 살고 있는 동네에서 멀리 나가면 여행 나온 것처럼 설렌다. 한강을 지나고 남산에 자리 잡은 국립극장에 도착하니 아직 한 시간이나 여유가 있어 주변을 걷다가 극장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마셨다. 몇 주 전 집 앞에서 아무 시내버스나 잡아타고 목적 없이 가다가 남산에 있는 국립극장을 보고 내릴까 하다가 지나쳤다. 한참 가다가 내려 그 동네를 어슬렁거리다 그대로 돌아오면서 다시 국립극장을 마음에 담아 두었다.
노배우 신구와 박근형은 디디와 고고로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렸다. 어려서 읽은 책 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제야 이 연극이 이해가 되는 듯하다. 다들 고도가 무엇을 나타내는지 원작자인 사무엘 베케트까지도 모르겠다고 했으니 그야말로 보기 나름이고 각자 해석하기 나름인 연극이다. 연극이 끝났을 때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였다. 인간실존의 외로움과 막막함을 이렇게 잘 표현한 연극이 있을까 싶다. 정말 오랜만에 연극을 봤다. 그래서 유독 그 느낌이 새롭다. 날것의 표현들이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고 배우의 작은 탄식이나 몸 뒤채는 소리하나까지 다 듣게 되는 그 집중이 오랜만이었다. 젊어서는 시골에서 서울로 연극을 보러 다닐 정도로 열정적이었지만 언제부턴가 시들해졌다. 창작극들이 주는 어설픔과 유행성에 싫증이 났고 심지어는 그 작은 공간들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국립극장은 대학로 무대들처럼 그렇게 작지도 않고 음악 홀처럼 크지도 않아 연극을 하기에는 최적의 공간이었다.
인생을 거의 다 살아 낸 배우들의 깊은 호흡과 표현이 마음 깊숙이 들어왔다. 깨어서 생생하게 살지 않는 시간들, 인생을 채우는 그 막막한 시간들과 삶의 미미함, 부조리들을 과연 실제 노년의 배우가 아니면 어찌 표현할 수 있을까 싶다. 더욱 놀라웠던 것은 포조의 하인으로 나온 럭키, 마치 인간이 아닌 당나귀 같은 존재로도 보이는 짐꾼 역할 박정자의 연기였다. 몇십 년 만에 본 그 배우는 과히 압권이었다. 한 분야에서 진득이 익어 가면 저렇게 놀라워지는구나 싶었다.
세계대전들을 겪은 유럽의 세대는 삶의 거대한 공허와 부조리 앞에 짓눌린다. 이 연극 또한 그 세대의 산물이다. 무엇인가를 희망하기가 어렵지만 그 희망 없이 살기도 어려운 인간의 부조리한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언제 올지 모르지만 또한 고도가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지만 그 비루한 삶을 살고 난 저녁에 언제나 나무 밑에 와서 고도를 기다리는 것이다.
젊었을 때 책은 읽었지만 연극은 봤는지 기억이 안 난다. 오늘 이 노배우들의 연극은 그 배우들이 주는 아우라 때문에도 눈물이 났다. 그 배우들이 가진 명성 때문이 아니라 그 배우들이 살아낸 삶의 연륜이 빚어내는 아우라 때문이다. 위대한 늙음이다.
이사 왔을 때 제일 좋았던 것은 집 뒤에 오래된 도서관이 있다는 것이다. 늙은 도서관엔 늙은 책들이 많다. 요즘 새로이 생긴 멋진 도서관들엔 오래된 책이 별로 없다. 도서관인지 거대한 카페인지 모를 정도로 코지하고 아름답고 기능성이 뛰어나다. 특히 젊은 엄마들이 아이들 데리고 와서 책 보고 카페에서 맛있는 것도 먹으며 시간 보내기 좋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새로 나온 책들 위주다. 사람들 눈길 끌만한 제목과 매끈한 표지 디자인의 책들이 창의적인 공간구조 속에 잘 진열되어 있다.
오래된 우리 동네 도서관이 3월부터 3년간 다시 짓는다니 여간 낙담이 되는 것이 아니다. 밤 10시에도 슬리퍼 신고 나가 반납함에 넣으면 되었고 그 어떤 오랜 책도 보존 서고실에서 다 찾아내주는 도서관을 허문다니ᆢ
세월이 주는 깊이와 연륜이 이제 곧 내 눈앞에서 허물어질 것이다.
- 이 세상의 눈물의 양엔 변함이 없지.
어디선가 누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면 어디에선가는 눈물을 멈추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니 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