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저녁을 먹고 뒷 산을 어슬렁 거리며 걷는다.
산은 산인데 아파트 담장과 맞닿아 있어 뒷마당 나오듯 가벼운 맘으로 걷는 산이다.
작은 두 언덕을 잇는 샛길을 오락가락하자니 문득 박목월의 시비가 눈에 들어온다. 뜬금없는 위치에 있다.
아마 오래전에 세웠을 것 같다.
요즘은 뭐든 아기자기하게 만드는데 이 시비는 큰 돌 하나 박아놓듯 세워놨다. 예전 국민학교 교정에 '성실'이나 '정직' 뭐 이런 덕목을 써서 턱 박아놓은 듯한 모양새다.
박목월이라는 시인도 참 오랜만에 보는 이름이다.
지하철 문에 쓰인 시를 주로 보고 사는 세대에 박목월 시는 이런 어둑한 숲 속에 있는 것이 맞겠다 싶다.
젊은이들은 거의 다니지 않는 숲길이다.
- 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고 살아라 한다
밭이나 갈고 살아라 한다
어느 산자락에 집을 모아
아들 낳고 딸을 낳고
흙담 안팎에 호박 심고
들찔레처럼 살아라 한다
쑥대밭처럼 살아라 한다 -
도시 한 복판 속 작은 산 숲 속에서 갑자기 산자락ᆢ들찔레 ᆢ쑥대밭ᆢ이런 단어를 한 동안 들여다본다.
나는 이런 단어에 거의 근원적인 향수를 느끼는 세대다.
단어를 보면 그 향기까지 느껴진다.
어느 산자락 외딴집에 드는 햇살, 그곳에 드는 바람까지도ᆢ
오가는 사람 하나 없는 그 고요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다.
어둠이 깃드는 아파트 사이 숲길, 시비 앞에 서서 잠시 딴 세상으로 빠져든다.
냉장고 안에 뒹굴고 있는 호박을 꺼내어 내일은 꼭 된장국을 끓여야겠다.
아파트가 날 에워싸고 뭐나 하며 살으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