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시아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by somewhere

감기로 고생 중이다. 덕분에 합법적으로 침대에서 원 없이 딩굴거려봤다. 재밌는 소설도 읽고 드라마도 보고.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란 소설을 읽고 있는데 재미있어 손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모처럼 이렇게 스토리 따라 쭉 가게 되는 책을 읽는다. 아파 누워서 먼 나라 습지대 50년대와 60년대를 오가는 이야기를 읽자니 좋다.


5월은 의외로 빨리 더워지지 않아 비가 내리다 바람이 불다 아카시아가 져 내린다. 문을 열고 나가면 동네가 온통 향기로 가득 찼다. 뒷산에 지천으로 핀 아카시아가 이제 분분히 지고 있다.

교회 카페지기 봉사 나가서 앉아있다 보면 늘 딸을 찾아오는 동네 할머니가 계신다. 항상 오셔서 딸이 왔느냐고 물어보신다.

처음엔 진지하게 5층으로 안내해 드리고 찾아보시도록 했는데 곧 알게 되었다. 치매가 있으신 할머니시고 실제로 교회 어떤 성도의 어머니셨다.

딸이 왔는가 물어보시고 앞문으로 들어오셨다가 뒷문으로 나가신다. 하루에 몇 번씩 오신다고 한다.

어제는 옷을 곱게 입고 오셔서 옷이 예쁘다 하셨더니 내 옆에 앉아 이야기하신다. 할머니 눈빛을 보자니 마음이 끌려 계속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할머니는 마음이 아프다고 하셨다. 딸이 예전엔 집에 살았는데 지금은 자주 오지 않는다고 ᆢ내가 알기로 그 딸은 매주 일요일 그녀가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이 교회로 온다. 어머니와 함께 예배를 보고 점심을 먹는다. 딸이 보고 싶다는 말씀이 유난히 가슴에 남는다. '보고 싶어 ᆢ'

할머니는 어느 시점에서 멈추신 것일까. 딸이 예전엔 할머니집 한 방에서 살았는데 이제 나가서 잘 안 온다는 말씀만 되풀이하셨다.

청파동에서 다녔다는 국민학교, 피난 갔었다는 수원. 결혼전 했다는 장사, 시집와서 살게 되었다는 이 동네 ᆢ

할머니 인생을 같이 더듬으며 할머니가 어디에서 멈추셨는지 혼자 찾아본다. 남은 것은 아픔이다. 평생 교회를 다니셨다는 할머니는 마음이 슬프시다.

딸이 보고 싶고 당신의 존재가 어디서 머무르고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모르신다. 손목에 자식들 이름이 새겨진 팔찌를 차고 계셔서 다른 동네 경찰서에서도 곧잘 모시고 오신다고 한다.

곱고 깨끗한 얼굴 ᆢ말끝마다 한숨을 쉬신다.


나이 들어 남는 것은 늘 이런 슬픔과 허무와 미진함인가.

잘 늙어야 한다고 늘 새기듯 생각한다. 허무에 빠지기보다는 충만함이 넘치는 노년이 되자고 그러려면 지금 잘살아서 어서어서 마음의 내공을 쌓아야 한다고 늘 바쁘다.

책도 읽고 기도도 하고 여행도 한다.

나는 과연 절로 한숨이 나오는 노년에 이르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노쇄해진 육체에도 충만하고 기쁜 영혼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분홍 빛깔의 매니큐어를 칠하신 손톱을 쓰다듬고 예쁜 반지들을 쓰다듬어 드리며 손이 참 곱다고 말씀드렸다.

곱게 입으신 원피스에도, 양손목에 있는 금은 팔찌에도, 양손가락에 있는 반지에도 외로움과 삶의 막막함이 배어있다.


어쩜 좋으냐 ᆢ이 삶을 ᆢ

우리가 알 수 없는 이 다음의 시간을 ᆢ


아카시아 향기는 바람에 휘날리고 시간은 차곡차곡 주름을 쌓으며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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