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밤, 창문을 열고...

개구리 소리 들리는.

by somewhere

밤 11시가 넘은 시간인데 잠을 자지 않아도 되니 참 좋다.

10시가 넘어가면 자야 한다는 초조감에 휩싸인다. 그래야 새벽에 일찍 일어날 수 있으니...

알람을 껐고 내일은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개구리 소리가 밀려온다. 도심 한가운데 이렇게 개구리 소리라니.

운이 좋다.


그동안 준비했던 아마추어 피아노 콩쿠르를 오늘 드디어 마쳤다.

제법 담담하게 들어가 피아노에 앉았건만 막상 연주를 시작하니 손가락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려 어떻게 건반을 눌렀는지 모르겠다.

땡소리가 나서 일어서니 어이가 없고 화가 났다. 그렇게 짧게 듣다니.

아직 발전부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끊다니....

내 앞에 친 남자는 나보다 훨씬 그럴싸한 곡을 가지고 왔지만 연주를 잘하진 못했다.

그래도 꽤 연주한 후에 땡소리가 났다.

그런데 나를 그렇게 빨리 끊다니. 물론 주제가 되풀이 되는 듯하니 끊었을 것이다.

혹시 고화질 영상을 신청하지 않아서 일찍 끊었나 싶은 유치한 생각까지 들었다.

대회니 경쟁이니 하는 것을 회피하는 쪽이라 내 인생에 이런 날이 있을 줄은 몰랐다.

3년째 배우고 있는 선생님이 여러 번 권하는데 계속 거절하는 것이 민망해 올해는 하기로 했는데 역시나 씁쓸하다.


배운 것은 많다. 하필 치고 있던 곡이 화려하지도 않았고 어찌 보면 콩쿨용 곡이 아니었지만 나름 성실히 연습했다. 내 한계를 버라이어티 하게 펼쳐주는 곡이었다. 그런 곡을 주신 선생님한테 살짝 실망도 했지만 배우는 주제에 뭘 이러쿵저러쿵하겠는가. 대회 나갈 땐 들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한 곡이 좋겠지만 작년에 배운 그런 곡들을 하지 않고 현재 치던 곡을 가지고 나가겠다고 한 것은 나였다.

화려하고 유명한 말하자면 연주회용으로 좋은 곡들을 하고 싶지가 않았다.


전생에 나는 베토벤 옆집에 살았거나 하다못해 그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었을 거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베토벤을 좋아했지만 오늘 내가 친 소나타는 처음 들어본 곡이었다. 이런 곡이 있었나 하면서 배웠다.

해도 해도 안 되는 트릴이 연속되는 부분이 있어 이틀 전에 두 번 굴릴 것을 한번 굴리기로 결정했다. 더 쉽게 가는 것 같지만 내용을 바꾸는 것은 엄청 위험한 일이다. 연습한 시간만큼 손가락에 각인되어있기 때문이다. 손가락 번호하나만 바꾸어도 연주가 꼬인다.

습관이나 루틴이란 얼마나 강하고 무서운 것인지.


억이 넘어가는 피아노가 즐비한 스타인웨이 갤러리를 빠져나와 나는 넋이 빠진 사람처럼 집과 반대방향으로 가서 고속터미널에 도착했다. 사람이 붐비는 지하상가를 기웃거리며 머리를 희석시켰다. 역시 주의를 환기시키는 데는 쇼핑만 한 것이 없다. 뭔가 억울하고 허무한 심정, 보상심리로 자질구레한 것들을 샀다. 아마 집에 가면 후회할 것들이다. 주렁주렁 비닐백들을 들고나니 발길이 돌려진다.


집에 도착해서 내 반응을 살피던 가족들에게 <죽썼어> 간단히 말하고

맥주 두 캔을 마시며 '미지의 서울' 드라마를 보는데 얼마나 달콤하던지....

어제 못 본 것과 오늘 하는 것까지 연달아 두 시간을 보니 11시가 다 되어간다.

하지만 나는 자지 않을 것이다.

창문을 열고 몇 달 동안 쓰지 않던 브런치를 열었다.

아직도 뭔가 가슴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풀어내야 할 이야기가 있는 것처럼.


나는 언제쯤 피아노를 그만둘까. 귀도 안 좋아지는데....

그동안 해왔던 것이 아까워서 그만 못 두는 것들이 내 일상을 차지하고 있다.

해 왔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해야 하는 것일까?

언젠가는 멈춰야 할 지점이 오겠지.


오늘 아침 눈뜨자마자 어제 읽다 잠든 책의 마지막을 읽었다.


- 숲은 내게 말했다. 모든 존재를 그 자체로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건, 바로 겹겹이 쌓인 시간의 층이라고 -

<흐르는 강물처럼, 셸리 리드>


책장을 덮고 뒷산의 우거진 숲길을 거니는데 마침 FM에서 잊고 있었던 음악이 흘렀다.

야나체크의 <수풀이 우거진 오솔길에서>

아주 아주 오래전 내가 좋아했던 영화 <프라하의 봄> 음악이기도 했다.

잊고 있던 그 선율을 푸른 산길을 걸으며 듣자니 새로운 욕망이 생겨난다.

저 곡을 치리라.

어쩌면 저곡을 치고 나면 내 인생의 피아노는 할 일을 다 한건지도 모른다.


무엇이 좋은지 누가 알겠는가.

어떻게 사는 게 맞는지 누가 알겠는가.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