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례의 태양, 오래된 책

by somewhere

지난주 삼례를 갔다. 펄펄 끓는 한 여름 땡볕아래 그저 그늘 찾기 바쁘고 어딘가 들어가기 바빴다.

일 년에 두서너번 만나는 오래된 모임에서 이제 소도시들을 가보자 해서 간 곳이 삼례이다.

기차 타고 오가며 지명만 보던 곳을 왔다.

결국 숙박은 전주에서 할 수밖에 없다. 삼례든 완주든 다 전주권이니까.

느릿한 말투의 택시 기사님은 전주가 발전을 못하고 쪼그라들고 있다고 한탄을 하셨다.

전주 하면 그저 한옥마을이나 전동성당만을 기억하던 우리는 마음이 찔끔한다. 모처럼 여행으로 들떴던 마음이 애잔해진다. 화려한 관광지 너머 진짜 삶이 펼쳐지는 일상의 속주름살 들은 어디서든 고만고만하고 애면글면이다.


일상을 떠나 한가해보자고 여기저기서 모여든 우리들은 신났지만 삼례와 완주는 여름볕에 팥죽땀을 흘리고 있다.

챗지피티에게 유명관광지 말고 한가하고 소소하게 다닐만한 곳을 추천해 달라 했더니 삼례 책마을을 권해준다.


어찌 모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엄청 큰 헌책방이 있다.

낡은 책 냄새가 퀴퀴하고 책벌레들이 스멀스멀 기어다니고 있을 것 같지만 주인도 보이지 않아 내가 에어컨을 켜고 천천히 훑어본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읽으시던 책 같은 것들이 있다.

맙소사ᆢ버려도 한 참전에 버렸을 것 같은 책들이 쌓여있다.

시간의 지층을 더듬듯 둘러본다.

친구들은 애저녁에 그 옆에 있는 더 크고 시원한 책방으로 옮겨갔다. 빨리오라고 재촉이다.


훨씬 크고 나름 규모 있게 정리된 그 옆 건물 책방에는

우리 세대나 알듯한 디제이 김광한의 전시회도 열리고 있다.

어느덧 그분이 고인이 되셨다는 걸 거기서 알았다.


그렇게 많은 헌 책이 있는데서 나는 귀신같이 책을 골라냈다.

다른 친구들 뒷짐 짓고 구경만 할 때 나는 어디선가 내가 읽어야 할 책이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가장 싸야 할 오래된 책이 가장 비싸다. 다 삼천 원인데 오천 원이라니 ᆢ

누런 책장, 깨알 같은 글씨, 원제와 턱없이 다른 한자 들어간 대학교재 같은 표지 ᆢ

그러함에도 이상하게 끌리면 그건 내 책이다.


두 권은 누가 봐도 살 만한 책이지만(발견해 내는 게 관건)

나머지 한 권은 어지간해서는 팔리지 않을 것 같은 책인데 ᆢ

그 책을 요즘 아침마다 산책길에 들고나가서 산책길 끝에 있는 커피숍, 아침 7시에도 불을 밝히고 문을 연 찻집에서 한 장씩 읽고 있다. 읽어진다는 게 나도 신기하다.


그런 경험 다들 있지 않나ᆢ

지금 내가 휩싸인 문제들에 대한 답을, 말도 안 되는 엉뚱한 곳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시간에 찾게 되는ᆢ

내가 뭔가 우주에 골똘히 싸인을 보내면 우주도 또한 내게 암호 같은 신호로 내 손에 쪽지를 쥐어주는 것 같은.


게다가 이번 주 산책길에서 내가 찾은 그 찻집은 실은 아직 오픈 준비 중이라 이른 아침에 온 내게 그냥 커피를 주었다.

결재하는 기계가 없다고 ᆢ

내가 지금까지 마셔 본 라테 중 가장 부드러운 라테였다.

빈 속에 마셔도 될 만큼.

그곳에서 이 오래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다음 날 가서 또 라테를 마시고 책을 읽고.

이곳은 이제 내 새벽 찻집이 될 것이다.

가장 필요하지만 손에 안 잡히거나 너무 어려운 책들을 읽게 될 ᆢ


이런 일들이 펼쳐지는 세상.

살 만하고 살고 싶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