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된 이야기가 듣고 싶은 밤.

한 달 전에 쓴 글.

by somewhere

여행을 다녀온 지 한 달이 다 되어가건만 아직도 밤에 잠이 잘 들지 않는다.

피곤해서 다른 일도 할 수 없고 눈이 피로해서 뭘 볼 수 없어 그냥 불을 끄고 드러누워있는 시간이 길어진다.

그런 시간이면 머릿속으로 날아다니는 상념이 끝이 없다. 맥락도 없고 기승전개도 없는 마치 요즘의 쇼츠같은 파편들이 휙휙 지나간다.

생각의 주체는 내가 아닌 것이 확실하다. 나는 그저 빈 화면일 뿐이고 이런저런 온갖 영상들이 마구잡이로 올라온다. 그 영상들을 선택해서 버튼을 누르는 손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문제는 그 화면이 비어있는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뭔가 듣고 있으면 잠이 오려나 싶지만 뭘 듣는 것도 피곤하다. 뇌를 써야 하니까.

시차적응이 안 되던 밤에 온갖 영상들을 다 봤다. 이제 뭘 봐도 지겹다. 뉴스도 지식도 엔터도….

그런데 어젯밤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가 듣고 싶다는.

어떤 이야기가 오래 묵은 이야기일까? 아라비안 나이트 같은 이야기를 원하는 걸까 아니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가 듣고 싶은 것일까?

요즘 세상에 숱하게 떠도는 이야기들에는 진절머리 나는 뭔가가 있다.

그래도 내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그래서 자주 브런치를 들락거리는지 모른다.

브런치글을 보는 이유는 나 같은 사람들의 사는 이야기가 듣고싶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슬며시 꺼내놓는 이야기들을 엿보는 것이 좋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를 드러내고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아무리 극내성적인 사람이라도 말이다.

내성적인 나같은 사람이 혼자 숨어서 이렇게 이야기 하기 좋은데가 브런치다. 남이 보든 말든. 어차피 모르는 사람들이니ᆢ


혼자 골방에서 매일같이 피아노를 치고, 영어도 공부하고 책도 읽으면서 이런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싶은 생각이 부쩍 든다.

어제 금요기도회를 갔더니 목사님이 꿈이 있는가고 물어보신다. 젊은이들에게 묻는 말씀이 아니다.

금요일 밤, 예배당에 와서 앉아있는 대부분의 중노년의 신도들에게 묻는 말씀이다. 계획과 꿈이라니… 이 나이에 화들짝 놀라게도 되는 말이다.

그러나 계획과 꿈을 분명히 인식하라고 하신다. 뻔하기도 한 그 말씀이 왠지 가슴에 들어온다.

그래서 기도했다. 내 삶이 분명한 방향을 잡게 해달라고.

퇴직 이후 삶이 스스로 분주하기도 하지만, 한편 돌아서면 우주에 떠있는 먼지같이 막막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세상살이의 깊은 함정은 아주 잘 살고 있는 것처럼 팽팽하다가도 돌아서면 아무것도 없는 듯한 짙은 공허와 낭패감에 빠진다는 것이다.

늘 메아리치는 질문이다.

무엇이 헛되지 않은가. 무엇이 의미 있는가.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는가.

이런 생각을 문득문득하면서 늘 그저 그런 삶을 살아나가니 더 씁쓸한 것 같기도 하다.


오래된 뭉근이야기, 내 영혼을 적셔줄 오랜 이야기가 듣고 싶다.

참신하고 새로운 이야기가 아닌 아주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누군가 내 늦은 밤 귓가에 나직이 읊어주었으면 좋겠다.


박찬욱의 새로운 이야기도 < 아… 맞아 내가 박찬욱을 별로 안 좋아했지? 깜빡하고 광고에 넘어갔네> 하며 극장을 나오고,

그저 웃자고 본 영화도 뒷맛은 씁쓸하고ᆢ 세상에는 색색깔의 옷을 입은 이야기들이 넘쳐난다.

이야기들의 제목만 보는 것으로도 시간이 주르륵 넘어갈 때가 있다.

왜 우린 이렇게 남의 이야기들이 보고 싶은 것일까?


<은중과 상은>은 정말 재밌게 봤다. 상은으로 나온 배우, 김고은을 평범하게 보이게 할 정도로 매력 있었다.

나는 독하고 절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좋아하나 보다. 절박함앞에서는 뭐든 무력해진다.

이제 60을 바라보는 퇴직 이후의 삶, 평온하고 안정되어 보이는 이 삶은 절박함이 없는 것인가.

나는 아직도 뭔가를 절실히 하고 싶은 게 있었음 좋겠다.



쓰다가 만 글에 이어 쓴다. 또 한 달이 지났다.

여행 중 다친 발목이 아직도 회복이 안되어 걷는 걸 망설이게 하는 나날들.


어제 또 아마추어 피아노 콩쿨을 나가보라 하시는 선생님 말씀에 신청하겠다고 했는데 어제가 신청마감일이었다.

레슨 끝날 때가 오후 4시 무렵이었으니 시간은 충분했다.

그런데 문득 신청해야 한다는 것이 생각난 것은 밤 11시 58분.

신청할 사이트 찾다가 자정이 되어 버렸다. 신청문은 닫혔다. 왜 그런지 모르겠으나 그렇게 절실하지 않지만 참 피아노는 끈질기게 친다. 귀가 아픈데도ᆢ


절실하지 않지만 계속하게 되는 것들을 하면서 사는 인생.

그래 ᆢ그냥 살자. 이렇게.


연습실에 도시락을 싸갈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