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김진영의 애도일기
그냥 무작정 도서관에 갔다가 우연히 집어 온 책이다.
읽다가 멈추고 눈을 감았다. 마음이.....
암 진단을 받고 운명하기까지 아주 짧게 적은 글들이다.
121
내 안의 텅 빈 곳이 있었다. 돌아보면 그 텅 빈 곳을 채우기 위해 돌아다녔던 세월이 나의 인생이었다.
도서관을 헤매던 지식들, 애타게 찾아다녔던 사랑들, 미친 듯이 자기에게 퍼부었던 히스테리들,
끝없이 함몰했던 막막한 꿈들.....
그것들이 모두가 이 텅 빈 곳을 채워서 그 바람 소리를 듣지 않으려는 몸부림들이었다.
그러나 그 무엇도 그 텅 빈 곳을 채우지는 못했다. 이제 또 무엇이 내게 남아 있는 걸까.
무엇으로 이 텅 빈 곳을 채울 수 있는 걸까.
이제 남은 시간은 부족한데 과연 나는 그 텅 빈 곳의 주인을 찾을 수 있을까.
129.
아침 산책. 단풍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서 하늘을 본다.
새들이 빠르게 하강하더니 더 멀리 날아간다.
가을 하늘이 왜 그렇게 맑고 깊고 텅 비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봐. 나는 텅 비어 있어. 아무것도 가로막는 것이 없어. 사방이 열려 있어.
모든 것이 길들이야. 그러니 날아올라. 날개 아래 가득한 바람을 타고.....
183.
사랑에 대해서 아름다움에 대해서 감사에 대해서 말하기를 멈추지 않기.
천상병은 노래한다. 세상은 아름답다고, 인생은 깊다고,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러니 바람아 씽씽 불라고....
이번 <한겨레> 칼럼은 천상병에 대해서 썼다. 어느 정도 만족.
192.
자유란 무엇인가.
그건 몸과 함께 조용히 머무는 행복이다.
195.
군포병원으로 면역 항암제를 맞으러 가는 길. 꽉 막힌 고속도로 느릿느릿 움직이는 차들을 내다보다가 갑자기 떠오르는 어머니 얼굴.
강렬한 그리움, 아니 그리움이 아니다. 살아서 한 번도 품어보지 않았던 욕망의 충동. 어머니의 품 안에 안기고 싶은, 아니 품 안으로 파고들고 싶은, 그렇게 어머니의 몸속을, 그 몸 안의 어떤 갱도를 통과하고 싶은 절박한 충동. 흙으로 돌아가기 위해 시멘트 바닥을 천공하는 지렁이처럼.
199
오, 세월이여, 지나간 날들이여, 나의 기쁨들, 즐거움들, 사랑들, 행복들이여.
그리고 아픔과 슬픔과 외로움들이여.
이제 나는 조용한 시간으로 돌아와 너희들을 다시 그리워하고 추억한다.
내가 너무도 사랑하였고 지금도 오늘 여기인 것처럼 내 마음속에서, 내 눈앞에서 찬란히 빛나는 너희들,
오, 그토록 아름다웠던 것들이여.
206.
병원 벤치에서 먼 하늘을 본다. 구름 한 점 없다.
맑고 깊고 드넓다.
모든 것들이 노래처럼 오고 가고 또 와서 간다.
스완의 노래란 이런 것이 아닐까.
233.
적요한 상태
234.
내 마음은 편안하다.
이렇게 끝이 나있다.
철학자 김진영(1952-2018)
이 책을 읽고 뭐라 쓸 수도 없고 안 쓸 수도 없어서 책을 옮겨 놓는다.
그저 내가 보기 위해. 아무 때라도.....
아침의 피아노라면 이런 곡을 연주하는 피아노 아니었을까?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1번 아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