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mewhere Jun 12. 2022

의미…의미…의미…

이승윤  <너의 의미>


빅터 프랭클의 책 속에서 읽은 에피소드 중 내 마음속 깊이 새겨져 있는 것이 있다.

사랑하는 아내를 읽은 노년의 신사가 그 슬픔을 주체하지 못해 정신과 의사인 프랭클을 찾아온다.

유난히 사이가 좋았던 부인을 떠나보낸 그 삶의 고통이 너무 커서 감당할 수가 없노라고 하는 환자에게 프랭클은 이렇게 말한다.

만약 부인이 살고 당신이 먼저 죽었다면 어떻겠냐고…..

한 동안 가만히 생각하고 있던 그 노신사는 다소 평안해진 표정으로 돌아간다. 그의 견딜 수 없는 고통의 의미를 알았기 때문이다.

그 심한 고통을 사랑하는 부인이 겪는 것보다는 자신이 겪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니 그 고통에 의미가 생겨난 것이다.

그 자신 빅터 프랭클이 야만적인 아흐슈비츠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자신이 놓여있는 매 순간에 계속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참으로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이다. 자신이 하는 일에서, 자신이 존재하는 삶에서 그 의미를 찾지 못할 때 그가 아무리 돈이 많고 명성이 높다 할지라도 인간은 쇠락해가는 것이다. 또 반대로 아무리 비루하고 남루해 보이는 삶일지라도 자신이 그 삶에서 의미를 느낀다면 그 사람의 얼굴에선 생명력이 느껴진다.

친정아버지의 오랜 투병으로 힘들었을  나를 가장 괴롭힌 것은, 아버지의 삶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내게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었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주변에 치매나 노환인 부모를 돌보는 걸로 힘들어하는 지인들이 많다.  또한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내가 살아보지 못한 삶은 감히 예단할 수도 없고 추측할  지만 그저 하루하루 시간을 견디고 있는 듯한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불쑥불쑥 들 때가 있다. 나 또한 그 나이에 가고 그 삶에 다다르면 어찌 될지는 모른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두렵다.

어떤 삶이 의미가 있는 삶일까?

드라마나 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재벌 2세들의 향락적이고 피폐한 삶을 보면, 그들의 부가 오히려 그들에게 인생의 의미를 찾을 기회를 방해하면서 무의미와 권태의 늪으로 빠져들게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기가 살고 있는 삶에서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나는 요즘 퇴직을 고민하고 있는데 어느 시점이 퇴직해야 하는 시점인지 결정하는 것이 어렵다. 나이 때문에 법적으로 퇴직당하는 경우가 아니고서 자발적으로 퇴직할 때 그 시점을 알아내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올해 갑자기 내가 하는 일이 썩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동안 직장 생활하며 많은 일로 힘들어서 때려치우고 싶다 할 때도 일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이제 연륜도 쌓이고 그럭저럭 일을 잘하고 있으면서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 그만둘 때가 된 건가 싶은 것이다.

살아 있는 매 순간 다 의미 충만하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우리는 항상 그 의미 위에서 살아간다. 그 의미가 우리가 살 방향을 이끌어주고 잡아준다. 혹은 무슨 의미가 있나 하고 고민하고 고군분투하는 사이 어느새 유의미한 시점으로 삶이 옮겨가 있는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나도 내 직업에서 내가 하는 일이 의미가 있다고 느낀 것은 일을 시작하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연륜과 경험이 쌓여 드디어 스스로도 의미를 느낄 수 있는 지점에 가 다다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아…이 일이, 이 삶이 의미 있어하고 시작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극히 드문 일 일 것이다.

견디고 견디는 사이 천천히 전진해서 의미에 다다르는 것이다. 마치 제품 생산라인에서 한 부분 부분들이 만들어지고 결합되어서 마지막에 뭔가를 기능할 수 있는 완성된 어떤 제품이 되는 것처럼..... 그 생산 과정에 있는 부품들이 다들 나는 무슨 의미인가 하고 주저앉는다면 영원히 의미를 못 찾을 수도 있다. 결국은 살아봐야 하는 것이다.

나는 내가 치매가 와서 완전히 나를 잃어버리지 않는 한은, 70이 되고 80이 되어도 스스로의 하루에 의미를 느끼는 노인이 되었으면 좋겠다.

여기저기 많이 아프겠지…. 몸의 부분들이 하나씩 기능을 잃어가고 퇴화한다 해도 그 의미를 손상당하지 않는 딴딴한 의미를 가진 노년의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꿈일까?

의미 있는 꿈이다.


최근에 불후의 명곡에 나온 이승윤의 <너의 의미>가 참 멋졌다. 담백한 산울림의 오리지널 버전과 아이유의 감미로운 버전까지 여러 <너의 의미>를 들었지만 이승윤 버전은 상당히 강렬했다. 단순함과 강렬함을 동시에 느끼게 해 준 편곡이었다.

너의 그 한마디 말도 내게는 커다란 의미가 있다는 걸 계속 불러 제낀다.

이승윤이 구사하는 음악적 어법의 한 특징이 이거다. 거두절미하고 핵심만 폐부 깊숙이 찔러 넣는 것.


누군가의 한마디 말이 그토록 커다란 의미로 울리는, 그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정말 아름다운 일이겠지.

어쩌면 깊은 의미를 주는 말을 계속해주는 그 누군가를 갖는 것이 끝까지 의미 있는 삶을 사는 비결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 존재가 사람이든, 신이든.

작가의 이전글 내 인생은 단지 무언가를 위한 준비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