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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where Jul 17. 2022

사랑했지만,

김광석 <불행아>

며칠 전 비교적 한가했던 어느 시간에 동료가 내 방에 놀러 왔다.

그녀는 내 딸보다 어린 20대 초반의 나이이고 코리안 아메리칸이다.  세 살 때 부모님이 미국으로 이민 가서 그곳에서 줄 곧 살다가 올해 1년 한국에서 지내보고 싶어서 한국에 와서 일을 하고 있는 친구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한국말 소통에 아무 지장이 없다.

이 친구와 이야기하다 보면 헷갈릴 때가 많다. 한국인인지 미국인인지가….

그래도 굳이 따지자면 실은 미국인이라고 봐야겠지. 한국인 부모 밑에서 또 한국인 교회를 다니며 자랐지만 어쨌거나 미국 학교에서 생활하고 그 문화에서 성장했으니까.

그 친구가 자기는 김광석 노래를 너무너무 좋아한다고 했다. 특히 김광석 <불행아>란 노래를 좋아한단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지금 우리나라 20대 친구들 중 김광석을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알기는 알까.

그것도 <불행아> 라니….

김광석 노래를 나도 젊어서 많이 들었지만 <불행아>는 얼른 어떤 노래인지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익히 아는 노래다. 그 노래가 실린 앨범 그림을 보니 내게도 있는 음반이다.

왜 그 노래는 제목과 같이 떠오르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한 때 노래방을 다니던 시절 내가 진짜 잘 부르고 싶었던 노래는 김광석의 <사랑했지만>이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이 노래를 잘하고 싶었지만, 음역이 낮은 나는 그 고음을 낼 수가 없었다. 고음에서 갑자기 여자 소프라노로 소리를 바꾸는 것은 김 빠지는 일이다. 유행가의 맛은 육성으로 끝까지 부르는 것이다. 나는 성악가들이 부르는 가요를 좋아하지 않는다. 에비맛도 에미맛도 없는 노래로 들려서 싫다.

내 기억에(틀릴 수도 있다 하지만 굳이 확인하고 싶지는 않다.) 저 음반을 끝으로 김광석이 죽었던 것 같다.

지금은 감히 김광석을 두고 이런 말을 할 수 없지만 그때 나는 김광석의 새 음반을 듣고, 왠지 김광석도 한계가 왔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이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김광석이 죽었다는 뉴스가 나왔고 나는 막연히 김광석이 음악적인 이유로 자살한 줄 알았다.

그리고 그의 죽음에 관한 진실은 그 누구도 알 수가 없다.


그때보다 나는 지금 김광석의 아름다움을 훨씬 깊게 느낀다.

그의 노래가 이렇게까지 사람들 마음속에서 영원히 사는 것은 그의 목소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김광석의 목소리는 이상하게 마음에 휘감겨 들어오며 마음을 아프게 하는 떨림이 있다. 아름다운 가삿말을 부르고 있어도 마음이 아프다. 김광석의 인생이나 사생활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하지만 노래로 보자면, 마음 깊이 슬픔이 또아리져 있는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시인 윤동주나 기형도가 그러하듯.

그러고 보니 이 세 사람은 모두 젊어 요절한 사람들이다.


나는 윤동주의 이 시를 읽고 말을 잊은 적이 있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 윤동주. 팔복 -


이 시는 성경에서 흔히 산상수훈이라 불리우는 마태복음의 내용이다. 그 성경말씀이 윤동주에게는 이렇게 읽힌 것 같다. 성경의 구절은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로 시작한다.


그냥 나는 이렇게 생각해본다.

사람들 마음 깊이 있는 슬픔은 마치 방부제처럼 사람을 썩게 하지 않는다.

슬픔은 결코 사람이 오염될 수 없게 만든다. 여기서 슬픔은 절망이나 고통, 괴로움 이런 차원과는 다르다.

윤동주가 늘 초저녁 푸르게 뜬 별처럼 내 가슴에 남은 것처럼,

기형도가 어둔 한 잎으로 영원히 내 마음속에 흔들리고 있는 것처럼

김광석도 영원히 저 떨리는 목소리로 내 마음에 남으리라.

그들은 결코 늙지도 않고 썩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아마 영원히 남을 것이다.


예수님이 '마음이 애통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셨을 ,

 애통함이나 슬픔은 결코 헛된 것에 눈을 돌리는 자들은  닿을  없는 상태이다.

진실, 진리를 직시하고 있는 자, 그 떨리는 아픔에 눈 감아버리지 않는 자만이 품는 슬픔이라 그들에게 복이 있다고 한 것이 아닐까.

우리를 진실에서 진리에서 눈 감게 하는 것들은 너무나 많다.

인간의 세상은 역사를 통해서 늘 그래 왔던 것 같다.


깊은 슬픔으로

윤동주는 별이 지나가는 하늘을 바라봤을 것이고,

멀리 북간도에 계시는 어머니를 불러봤을 것이다.

잎새에 이는 바람을 바라봤을 것이다.


오늘 내게는 무엇이 남아 슬퍼할까.


김광석의 <불행아>를 얼른 떠올리지 못한 것은,

가사에 <인생아>란 말이 나오지 <불행아>라는 말이 안 나오기 때문이다.

모든 노래 가사 속에는 제목이 나오기 마련인데 이 노래는 그렇지 않다.

이 노래 제목을 바꾸고 싶다. <인생아>라고.....



꼭 한 번만이라도 이 노래를 육성으로 끝까지 불러보고 싶다. 삑사리 내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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