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두 계단만.

by somewhere

설악산 자락 계곡에 앉아 글을 쓴다.

지난달 딸이 속초에 놀러 갔다는 톡을 받은 순간 그냥 추석 연휴 속초 숙소를 예약해버렸다.

그리고 추석에 헤쳐 모여를 했다.

우리는 순천에서 양양으로, 애들은 서울에서 양양으로 와서 우리를 픽업해 속초로 왔다. 부쩍 강원도 나들이가 잦아진다.

숙소는 계곡가에 나무 벤치와 테이블이 연달아 있는 사진을 보고 예약했던 터,

오래 시간 동안 매만지고 다듬은 기분 좋은 정갈함과 시간의 흐름이 쌓여있는 정겨움으로 참 마음에 드는 게스트 하우스다.

아침이면 다들 어딘가로 나가는데 우리 가족은 야외테이블에서 브런치를 먹고 각자 한 테이블을 차지하고 책을 읽거나 노닥거린다.

오후엔 애들이 해보자고 해서 파도타기를 할 요량이다. 야외 액티비티를 안 좋아하지만 이번엔 어쩐지 한번 해볼까 하는 마음이 난다.

더 늙어 진짜 아무것도 하기 힘들어질 때를 위해 추억거리라도 만들어두자는 마음으로.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으로 설악산을 왔던 기억이 난다. 숙소 앞 흐르는 개울가에서 세수를 하라 해서 다들 수건 목에 두르고 개울가로 나와 세수하고 들어갔었다. 그때는 그랬다. 그러니 한 사십여 년 만에 설악산을 온 것이다.

내가 살던 곳에서는 설악산은 어떤 어마어마한 상징성이 있었다. 설악산을 다녀왔다 하면 국내 최고의 진귀한 여행을 하고 온 듯한 느낌이었다.

내가 어려서 우리 동네 어른들이 오랫동안 계를 해서 설악산을 간다면 마치 외국을 가시는 구나 하는 느낌.


그런 설악산을 왔다. 그냥 오면 되는 설악산 인 것이다. 어제도 오전 내내 한량을 부리다가 오후 1시쯤 산을 향해 갔는데 명절에 설악산을 오는 사람이 많아 깜짝 놀랐다. 내가 예상했던 산행의 이미지가 아니었다. 나는 호젓하게 산길을 걷게 될 줄 알았었다.

그나마 비룡폭포 쪽은 사람이 많지 않아 다행이었다. 비룡폭포까지는 그럭저럭 갈만했는데 그곳에 서있던 토왕성 폭포 전망대가 400미터라는 푯말이 문제였다.

400미터라니 식은 죽 먹기 아닌가….

그 하나 달랑 남은 푯말을 보고 우리 한민족의 DNA로 안 갈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까짓 거 가보자 하고 나선 길이 하염없이 계단이었다. 죽을 듯이 올라갔는데 기껏 100미터 왔다. 300미터가 남았다니 눈앞이 노래졌다.

진짜 이러다 심정지 오는 거 아닌가 싶었다. 뭔가 조심하지 않으면 진짜 산에 헬기 뜨게 할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이 느껴졌다.

평소 운동을 좀 하고 살았으면 좀 좋아… 그렇게 나무에 기대어 숨을 가다듬고 있는데 내려오는 사람들의 그 뻔한 거짓말, 어디서나 먹히는 공식적이고 위대한 거짓말 ‘ 다 왔어요. 조금만 가면 돼요. 가면 정말 좋아요. 힘내세요. 파이팅…..’


누구나 입에 달고 하는 말인 줄은 알지만 그래도 번번이 그 말에 기대어 가보기로 한다. 대신에 작전을 세운다. 그 작전 또한 누구나 아는 뻔한 작전이다.

고개를 숙이고 내 발끝만 바라보고 절대 위를 보지 않는다. 모자 창에 가려져 내 발끝부터 딱 두 개 위 계단만 보이는 시야각도를 유지한 채 그 두 계단만 오르기로 하고 간다. 그 두 계단만 오르기로 하니 빨리 갈 필요도 없다. 아주 천천히 두 계단씩만 갔다. 그러니 올라가진다. ‘천천히’가 끝까지 갈 수 있게 한다. 딱 두 계단만 보고 가는 것은 평정심과 안정된 호흡을 유지하게 해 준다.

위에서 이런저런 사람들 말소리가 들려도 결코 고개를 들지 않는다. 보면 생각보다 많이 남아 또 절망할 수 있으니….

다 왔으려니 하는 지점에서도 두 계단이 더 보이니 실망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그렇게 다 올랐다.

결국 끝까지 올라갔고 가서 본 산은 정말 절경이었다. 설악산을 왔구나 하는 것이 느껴지는….. 산수화에서나 보던 풍경들. 깎아지른 절벽 산들.

내려올 땐 다리가 거의 트레몰로 주법으로 흔들거렸다. 중간에 넓적 바위에 걸터앉아 다리를 사정없이 바위에 부딪히면서 근육을 좀 풀어준 뒤 다시 하산했다. 저녁에 잘 때 다리가 아파서 끙끙 앓았지만 기분 좋은 고통이었다. 또 자고 일어나면 어느 정도 가라앉는다는 것을 다 아는 통증이니까.

통증은 가실 것이고 내가 설악산 토왕성 폭포에 다녀왔다는 사실만 남는다.

힘들 땐 딱 두 계단씩만 보고 가야 한다. 그러면 어느덧 계단이 끝나는 지점에 다다른다. 인생살이도 그렇다.

힘든 시간을 지날 땐 딱 두 계단만 더 보면서 멈추거나 주저앉지 않고 그냥 발을 내딛는 것이다.

그 내딛는 발이 우리를 어딘가로 데려다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