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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where Dec 18. 2021

<욕구들>  - 캐럴라인 냅 -

감각의 거식증을 지나서.....


이 책을 읽고서 나는 왜 거식증에 걸리지 않았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책의 저자와 비슷한 점이 꽤 많은 유년시절을 거친 것 같은데 아니 어떤 면에서는 더 안 좋은 상황이 많았는데 왜 나는 거식증에 안 걸렸을까. 욕망의 억압이 덜했던 것도 상처가 덜한 것 같지도 않다. 왜곡된 문화와 가부장적인 전통에 훨씬 더 많은 수치심이 있었고, 남들 눈에 하자 없이 보이는 것이 너무 중요한 무서운 엄마가 내 인생을 장악하고 있어 공포도 깊었다.

동양인이건 서양인이건 간에 욕구가 억압당했을 때에 차오르는 슬픔과 상처는 같을 텐데 그것을 느끼는 감수성도 결국 그 사회의 가치 프레임 안에서 결정되는 건가 싶다.

캐럴라인의 분석을 따라가다 그 집요함에 질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이렇게 까지 치열하게 문제를 제기하거나 성찰하지 못해서 나는 내 우울이나 답답함이 어디서 오는지 모르고 살았나 싶다. 캐럴라인처럼 끈덕지게 통찰했다면, <자신의 개인적 고통을 더 큰 맥락에서 보는 법을> 배우기까지 했더라면 고통에서 좀 더 빨리 놓여날 수 있었을까.

캐럴라인처럼 극단적이지는 않았지만 내게는 감각의 거식증이 있었던 것 같다. 나 자신을 마비시키고 스스로를 내 인생에서 소외시키며, 마치 저자가 자신의 생명력을 깎아 나간 것처럼 나는 스스로 생기를 지우며 살아나갔었다. 욕구를 가지면 빈번히 억압되거나 차단되니, 아예 스스로 거세하듯 자신의 감정과 감각을 마비시켰던 것이다. 감정을 일게 하는 일에 잘 관여하지 않으며, 삶에 대해 욕구를 가질수록 상처가 깊어지니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고 인생을 초탈하는 것이 내 젊은 날의 목표였다. 하지만 그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책에도 나와 있듯이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 삶에 기쁨이란 없다.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뭔지 모른 체 늘 헛헛해서 세상을 부유하듯 떠돌거나 사람들 사이를 기쁨이나 깊은 교류 없이 떠돌다가 물건들 사이를 떠돌기도 했다. 젊을 때는 내 삶이 마치 내릴 닻이 없는 배처럼 혹은 돌아갈 집이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었다.

나는 줄 곧 내 우울의 원인이 엄마 때문이라 생각했는데 그 엄마도 본인이 잠겨 살았던 그 세월의 문화와 통념으로 빚어진 가치체계의 결과물이라는 걸 이해하게 되었다.

 나도 이제 엄마지만 도대체 어머니라는 존재는 왜 이렇게 중요한지 무섭기까지 하다.

언젠가 북클럽 멤버들과 하던 200자 릴레이 글 속에서 내 인생에 생기가 돌고 설렘이 일기 시작했던 변화에 대해 쓴 적이 있다. 실로 오랜 시간을 통해 일어난 일이다. 엄마가 되고 나서부터 엄마가 아이들 인생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니 아이를 사랑하는 만큼 엄마로서의 나 자신이 무서워져서 답을 찾아 헤매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들 인생을 병들게 하거나 망칠 엄마가 되지 않기 위한 길을…. 변화는 마치 불교에서 하는 비유로 선녀의 옷자락이 하루에 한 번 바위를 쓸어 결국 그 바위가 닳는 것 같은 느린 속도로 오는 것 같다. 하지만 오기는 온다. 지금 되돌아보면.

<희망은 의지와 끈기와 믿음에 관한 것이고, 대개 감지하기 어려울 만큼 너무나 점진적인 개인적 변화와 사회적 변화에 관한 것이며, 사람이 일상적으로 치러내야 하는 고군분투, 그 진부하고 혹독한 영광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 중요함이라고 표시된 선반에 들어 있는 것은 물론 연결이고 사랑이다. 인간 허기의 가장 깊은 근원에 이름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다. 너무나 많은 여자들이 들어가 살고 있는 억제의 상자들을 조각조각 박살 낼 수 있는 도구는, 공허감을 산산조각 내고 그 밑에 묻혀있는 희망을 드러낼 수 있는 커다란 망치는 바로 그것일 것이다. 사랑.>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이며 욕구인 사랑, 그리고 인간의 삶에서 원형질이라 할 만한, 가장 필수적인 엄마의 사랑이 결핍되거나 왜곡될 때 인간의 영혼에는 가장 깊은 생채기가 남는다. 나의 엄마는 사랑은 많았고 강했으나 철저히 왜곡된 사랑이었다. 사랑할수록 무섭고 숨이 막히는 사랑. 엄마가 우리 엄마가 아닌 것이 어릴 적 내 바람 인 적도 있었다.

사랑의 허기가 깔려있는 인간은 외부적으로 무엇이든 갈구하게 된다. 끝없이 떠돌고 원하게 된다. 하지만 어디서든 만족과 충족은 찾을 수 없다. 외부에서 찾는 물질적 충족은 언제나 더한 갈증만 불러일으킬 뿐이다. 물질의 차원에서 영원한 것이 없는 것처럼 영원한 만족이란 없다.

<여기서 어려운 부분은 사랑을 찾아내는 것이며, 그런 다음 사랑이라는 커다란 망치를 집어 들고 그 억제의 상자를 깨고 나오는 것, 다 깰 때까지 그 망치를 꼭 붙들고 놓지 않는 것이다. 이는 그 자체로 만만치 않은 위업이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 개의치 않은 채 억제를 부수고 나갈 힘과 용기와 자기 수용을 이끌어내야 한다. >

<열쇠는 통찰보다는 기꺼이 해보겠다는 마음과 더 깊은 관계가 있다>

나는 키워야 할 사랑스러운 아이들 때문에 기꺼이 해야 하는 정도가 아닌 해야만 한다는 절박함으로 맨 땅에 헤딩하듯 자신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을 찾아 헤맸다. 저자가 스컬로 거식증의 늪에 균열을 내기 시작하듯 나는 나만의 길로 계속 더듬거리며 나아갔다. 캐롤라인이 운동을 통해 몸과의 관계를 새롭게 맺어가며 변화해 가듯, 나도 몸의 감각을 느끼게 되면서부터 정서적 무감각과 마비된 의식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희미하게 스며드는 생기를 느끼며 나는 설레 이며 살아나기 시작했다. 저자가 말한 <고통의 조류를 헤엄쳐 반대편 해안으로 나아간 사람들>의 몇 가지 파일 속에 분류되었던 <영성>을 통해, 정확히 설명하기는 어려운 어떤 사랑과 충만함의 시간 속에서 변해갔다.

내가 앞으로 얼마나 더 나아가야 할지는 모르겠다. 끝도 없는 길이다. 아직도 나는 엄마를 못 견뎌하는 순간들이 있다. 또한 딸을 향한 어찌할 수 없는 염원들을 가지게도 되지만 깨어서 내려놓고자 한다. 딸에 대한 염원 속에는 엄마가 내게 가졌던 그 문화 속의 바램이 묻어 나온다.


<그 일을 충분히 오랫동안 지속하면 그러는 사이 어디쯤에선가 자신이 공허감과 절망의 순간들을 지나 살아남을 수 있음으로, 고통을 기쁨으로 상쇄할 수 있음으로, 공포 대신 안전함을 느낄 수 있음으로 이해하기 시작한다.>

나는 아직도 잠들려 불 끄고 누울 때나 새벽에 잠이 깨어 시공간이 가늠되지 않는 시간에, 갑자기 이 인생이 거대한 공허로 느껴질 때가 있다. 공허와 부조리와 깊은 슬픔이 내 존재 아래로 흐르고 있음을 느낄 때가 있다. 아마 죽을 때까지 없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도 캐럴라인처럼 그것이 다가 아니라고 희망을 가진다. 그 공허와 슬픔 위에서 우리는 그래도 사랑하고 서로 연결되며 기쁨으로 서로 다독이며 나아갈 것이다.

헛된 만족이 아닌 깊은 만족, 감각적인 욕구에서 더 근원적인 욕구로 나아가며 그 욕구들이 충족될 때 우리는 진정한 기쁨을 만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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