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 산책을 하는데 뭔가 따끔거린다.
걷다가 보니 바지에 도둑가시가 몇 개 붙어있다.
길 가에 무리 지어 있는 거 보고 가운데로 잘 피해 걸었는데도 몇 개가 어느새 엉겨 붙었다.
봄에 멋모르고 쓸고 지나갔다가 큰 낭패를 본 적이 있다.
한 달 전 그렇게도 화사하게 코스모스가 피고 백일홍이 피어있던 들판이 어느덧 쓸쓸한 가을빛으로 저물고 있다.
드라이플라워처럼 마른 색깔로 줄 서있는 도둑가시풀들이 왠지 예뻐서 사진을 찍는다.
어디서든 엉겨 날아가거나 이동해 종족을 번식해야 하는 풀.
모든 동식물의 최대 생물학적 존재 이유는 종족번식이다.
인간은 가족이라는 단위를 통해서 그 흐름을 이어나간다.
가족처럼 많은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오는 구성체가 또 있을까?
최근 철 지난 드라마를 봤다.
가끔 그냥 가벼우면서도 가볍지 않은 드라마가 보고 싶을 때가 있다.
좀 달콤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고 하지만 식상하지 않고 뻔하지 않은 뭐 그런 드라마...
<멜로가 체질> < 나의 해방 일지> <나의 아저씨> <유나의 거리>
이런 드라마들을 좋아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재벌이 안 나오는 드라마 찾기 어려울 것 같은데 귀신같이 재벌이 나오지 않는 드라마들만 고른 것 같다.
그 드라마 리스트 위에 하나를 덧붙인다.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
몇 년 전 이 드라마에 대해 이야기들 할 때 좋은 드라마인 줄 알았지만 별로 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아마 <가족>이라는 단어 때문에 그랬을 수 있다.
이제 '가족'이란 단어의 대표 후렴구가 되어버린 단어 <상처>
가족 안의 얽히고설킨 상처들. 제각각의 입장에서 각자 풀어내는 상처들을 별로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나 클래식은 옳은 법.
눈물 줄줄 흘리며 봤다. 뒷 날 눈 부어서 출근할까 봐 걱정하며....
난 그 가족 구성원 중 유난히 아버지와 큰 딸에 감정이입이 많이 되었다.
자신에 대해 구구절절이 이야기하지 않고 묵묵히 견디는 캐릭터들.
큰 딸이 골목길에 주저앉아 가슴을 치며 울 때 같이 울고, 그 남편에게 보낸 메시지에 울었다.
자신을 사랑할 수 없는 남편에게 친구로 지내자고 하면서 언젠가 남편이 이야기해줬던 인디언들의 '친구'를 말한다.
친구, 내 슬픔을 등에 지고 가는 자.
- 당신은 내 슬픔을 등에 지고 가. 난 당신 슬픔 지고 갈게 -
내 슬픔을 등에 지고 갈 사람이 어떻게 친구일까? 그런 친구가 있을까?
내가 생각했을 때 내 슬픔을 등에 지고 갈 사람은 ‘엄마’라는 존재밖에 없다.
자식은 부모의 슬픔을 등에 지고 갈 수 없지만, 부모는 자식을 슬픔을 더 크게 지고 간다.
그 정도쯤 되어야 한 존재를 생존시키고 키워낼 수 있어서 생물학적으로 <무조건적인 사랑>을 부모에게 장착시켰을까?
그 정도의 사랑이어야 한 생명을 다음 대로 이어나가게 할 수 있을까?
힘들게 살아온 드라마 속 어머니는 어느 선에서 어머니의 역할을 멈추고 싶어 한다.
이제 그만 자식들을 무서워하고 싶다고 한다. 나는 그 <무서워>한다는 표현에 공감했다.
어머니들은 사랑을 내리 퍼 주면서도 자식들 눈치를 본다.
자식들은 부모의 사랑에 만족하는 법이 없다. 언제나 불만스럽다. 부족하거나 넘치는 것이 아니라 이래도 저래도 불만스러운 것이다.
사랑이 넘치면 넘쳐서 불편하고 부족하면 부족해서 허기가 지는 것이 부모사랑이다.
나도 인생의 많은 시간을 부모와의 관계로 힘들어했던 사람인지라 그 드라마를 보면서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 어머니의 사랑이 나를 너무 힘들게 하고 지치게 했기에 내 사랑이 내 자식들을 힘들게 할까 봐 두려웠다. 두려워서 지레 조심할 때가 있다.
또 부모는 부모라는 이유로 그냥 자식 앞에선 죄인이다. 나도 내 어머니를 마음으로 서슬 시퍼렇게 비난한 적이 많았다. 그리고 내 자식에게서 그렇게 비난받은 적도 있다.
자식이 있기에 부모 심정 잘 알 것 같지만 부모 앞에 가면 여전히 자식으로만 선다.
나는 그 드라마에서 늘 집안의 귀염둥이 역할만 하던 막내아들이 집을 몰래 떠나려 했다가 실패하고 다시 돌아왔을 때 그것을 안 어머니가 너무나 슬퍼하며 화를 낸 부분이 좀 이해가 안 갔다.
엄마는 엄마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충실했지만, 아들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여서 지지고 볶는 집에서 벗어나고 싶어할 수 있다. 더구나 그 아들은 이리저리 눈치 보며 늘 해맑게 감초 노릇을 해야 하는 막둥이 자리 아니던가. 얼마나 그런 노릇을 벗어던지고 싶었을까.
엄마는 자신이 희생하며 고군분투로 가정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자식의 그런 행동이 큰 배신으로 다가왔겠지만 그것은 단지 엄마 입장일 뿐이다. 같은 상황을 겪으면서도 자식은 다른 입장일 수 있고 부모 상황 끝까지 다 헤아리는 자식은 없다. 또 젊은 나이에 자기 집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은 이들이 있을까.
드라마에서 그 집에는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 사건을 기점으로 엄마가 엄마 노릇을 중단하고 자신만의 길을 가기로 결심한다.
그동안 자신이 하고 싶었던 여행길에 담대히 오른다.
그리고 어느 날,
돌아온다.
밝고 환한 모습으로 돌아온다.
왜 그 엄마가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엔딩이냐며 씁쓰레하는 글을 봤다.
그 글쓴이가 왜 그 말을 하는지 의중은 알겠다.
하지만, 그 엄마가 어디 가서 결국 평안을 찾을 수 있을까.
여행길에서 환하고 아름다운 행복감, 자유를 만끽했다 할 지라도 결국 평안은 내가 있던 자리에서 찾아질 것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 여행 갔다가도 꼭 다시 돌아오지 않는가.
우리 삶의 자리로...
그 삶이 누추하고 슬플지라도....
우리 연배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때면 마치 우리가 사이에 낀 세대 같다는 말을 한다.
자식들에게는 그들에 맞게 쿨하게 대하려 노력하면서도 우리 부모세대에게는 그들을 이해시킬 수 없으므로 그들의 삶의 방식을 이해하고 받아주어야 한다는….
가령 우리 부모 세대들은 노인시설에 가는 것을 버려지는 걸로 생각하지만 우리는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제 발로 스스로의 노후를 정리해야 된다고 생각할 줄 안다.
부모를 보면서 내 자식들이 나를 어떻게 볼 지 생각하게 된다.
자식을 보면서 내 부모가 얼마나 가슴 쥐며 살았을지 알게 된다.
세상의 모든 드라마나 사람들이 꿈꾸는 가족 판타지.
늘 사랑이 영글고 서로 안아주고 품어주며 위로해주는 관계.
드라마는 마지막에 가서 드라마답게 판타지를 보여주며 끝낸다.
모든 판타지가 그렇게 귀결되는 것 보면 가족은 응당 그러해야 하나...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고 배려해주는 모습.
가장 편해서 가장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관계.
그 본능적 편함은 필히 염증을 불러온다.
그래서 가족은 어느 시점부터는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물리적 정신적 거리….
그 거리가 가족의 애틋함을 유지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