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축제

눈이 오다니....

by somewhere

마지막 축제였다. 오늘은...

퇴직하기 전 마지막 업무. 학교 축제.

2주간 입술이 부르트도록 준비해서 오늘 드디어 축제가 끝났다.

즐거워하고 환호하는 아이들을 보니 안도가 되었다.

고생한 아이들, 공연한 아이들에게 간식을 먹이며 창밖으로 흩날리는 눈을 보았다.

눈이라니... 눈이라니... 이곳에 눈이라니...

퇴근해서 집으로 오는데 10분이면 가는 거리를 1시간이 지나도 도착하질 못한다.

믿을 수가 없다.

단지 하늘에서 눈이 내릴 뿐인데, 아직 길이 얼지도 않았는데 차가 움직이질 못한다.

몇십 년 만이지? 이런 일이.

눈이 너무나 희귀한 곳. 눈이 내리다니...

그 눈처럼 희귀한 약속이 있는 저녁이라 결국 가다가 길가에 차를 대놓고 그냥 걸어서 가기로 한다.

오랜만에 연락이 온, 오랜 친구와의 약속 때문이다.

홀가분한 마음에, 그리고 눈이 오니 그 눈 속을 걷고 싶어 불 꺼진 화원 앞에 차를 대놓고 걷는다.

다행히 거의 집 근처까지는 왔기에 그냥 걷기로 한다.

이런 눈 내리는 밤을 걷다니. 마치 어떤 판타지 속을 걷는 것 같다.

친구와 맥주를 한 잔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친구와는 같은 동네 산다. 초등학교 2학년인지 3학년인지 때부터 친구다.

그런데 거의 반년만에 본다. 일 년에 한두 번을 본다 한들 만나면 늘 마음은 같다.

함께 살아온 시간의 두께가 깊어서 인가 보다.

술도 마신 터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결국 친구가 눈물짓는 고개를 넘게 된다.

그렇게나 오랜 친구인데도 듣다 보니 내가 몰랐던 일들이 있다.

어려서 그 친구는 내가 살던 읍내에서 칭찬이 자자한 참하고 예쁜 모범생 아이였다. 그 시절 피아노가 귀하던 시절이었는데 그 친구는 참 피아노를 잘 쳤다. 그 이유를 오늘 알았다. 그 친구는 처음 피아노를 배울 때부터 제대로 된 선생님한테 기본기부터 탄탄히 배웠다. 그리고 중학생 때도 옆 도시로 레슨을 다녔다 한다. 나는 왜 그 이야기를 듣고 화들짝 놀랐나 모르겠다. 내가 진짜 몰랐을까 아니면 잊어버렸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 친구는 뭔가 정석으로 피아노를 치는 것 같았고 나는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 속된 말로 늘 '후루꾸'였다.

게다가 그 친구집은 집도 좁은데 피..아..노를 샀었다. 그래서 나는 그 아이집을 시도 때도 없이 놀러 가서 그 애가 피아노 치는 것을 바라다보았다.

동네 모퉁이에서 가게를 하던 친구 어머니가 그렇게나 피아노 선생을 물색해서 친구를 가르친 줄은 정말 몰랐다. 나는 공주처럼 자라던 그 친구가 어려서 너무 부러웠는데 그 친구는 우리 집이 부러웠다고 한다.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 모퉁이에서 '00 상회'를 하시던 친구 어머니는 내가 친구와 같은 방에서 자취를 하던 대학교 2학년 때 일찍 돌아가시고 철없고 무심했던 나는 그 이후 친구와 따로 살게 되면서 친구가 얼마나 힘든 시간을 살았는지 잘 몰랐다. 남에게 관심이 없는 무심한 성격 탓이다.

나는 맥주를 잘 마시는데 술을 잘 못 마시는 그 친구는 기껏 맥주 반잔 마시고 불콰해져서는, 엄마가 가게를 보다가도 자기에게 맡겨놓고 친구들과 막걸리를 마시곤 했던 것이 너무 싫었다고 했다. 세상 얌전하시고 마음 좋으시던 친구 어머니가 술을 드셨다는 것에 오늘 또 놀랐다. 아마 다 알았었던 사실인데 잊어버렸나 보다. 우리 큰 이모와 친구였던 그 어머니는 당연히 술 한잔씩 하시며 인생고개 넘으셨겠지.

장애인 딸을 둘이나 두었던 우리 큰이모도 술 한잔씩 하시고 울고 웃으며 그 인생길 넘으셨을거다. 어찌 그러지 않겠는가.

그 좁고 작은 가게에서 평생을 사시던 친구 엄마는 푼푼히 번 돈으로 막내딸을 그리 살뜰히 키우셨나 보다.

내가 어릴 적 피아노를 배운 다는 것은 엄청나게 귀족적인 일이었다. 우리 시골에서는.

그런데 옆 도시로 원정레슨까지 시켰다니 참 대단하셨다. 그런데 내 친구는 왜 전공을 하지 않고 영어교사가 되었을까? 그것도 희한한 일이네.

나는 음악교사가 되고…

기분 좋게 술을 마시고 나오는데 세상이 온통 하얘져서 마치 관광지에 온 것처럼 친구와 서로 사진을 찍어 주었다.

우리가 깔깔거리고 웃으며 사진을 이리저리 찍으니 지나가던 남자분이 찍어주시겠다고 한다.

이런 것은 관광지에서나 일어나는 일 아닌가?

동네에서 이런 일이 있는 것은 아무래도 눈이 오기 때문이다. 믿을 수 없는 눈이 계속 내리기 때문이다.

눈이 오는 밤은 고요하다.

친구가 먼저 집으로 들어가고 우리 집으로 걸어가다가 괜히 편의점에 들어가서 커피를 한 잔 사서 편의점 밖에서 눈 내리는 텅 빈 거리를 바라본다.

커피를 들고 걸으니 눈이 커피 속으로 내린다. 눈이 녹아들어 간 커피를 후후 마시며 걸어간다.

믿을 수 없는 밤이다.

믿을 수 없는 사실들이 내 의식 저 밑바닥에서 잊히듯 있었다가 떠오르는 밤…


나는 이 눈도 내리지 않는 따뜻한 남도의 겨울이 싫어서 북녘땅으로 이사 갈 생각을 했다.

강원도 끄트머리 어디쯤.

눈이 내리면 길이 사라지고 어디선가 백석의 당나귀가 응앙응앙 울 것 같은 그런 곳으로.


회한 없이 눈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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