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퍽

분실물 보관소

by somewhere

우리 집엔 '노퍽'이 있다.

소설책에서 본 지명 '노퍽'은 분실물 보관소 같은 곳이다. 소설 내용에 의하면.

'그곳이 위치한 지형 때문에 그곳을 통해서는 어디로도 갈 수 없어 사람들은 모두 우회해 지나간다. 그런 이유에서 가장 평화로운 장소 그런대로 아름다운 구석이 된 곳, 그래서 분실물 보관소 같은 곳'이라고 설명하는 교사의 말을 듣고 아이들은 그곳을 환상 속의 세계처럼 받아들인다.

'혹시 귀중한 뭔가를 잃어버렸다 해도, 애써 찾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해도 일말의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 어른이 되어 자유롭게 전국을 여행할 수 있게 되면 노퍽에 가서 그것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여기고 위안을 삼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 소설 <나를 보내지 마> 중에서 -


정리를 잘 못하는 나는 버리기엔 아깝고 어딘가 둘 데가 마땅치 않은 것들을 넣어두는 곳이 있다.

시작은 제법 멋진 진열장이 되려 했으나 갈수록 이것저것이 담겨지는 창고 같은 곳이 돼버렸다.

아이들 사진, 결혼사진, 어디선가 온 꼭 간직하고 싶은 편지들, 예뻐서 차마 버릴 수 없는 포장지 혹은 포장상자, 여행에서 사 온 인형들 또 무슨 증명서니 세미나 이수증 이런 것들을 그냥 넣어둔다.

최근 그곳에 들어간 물건은 며칠 전 커피숍에서 가져온 컵 홀더다. 일회용 컵을 감싸고 있던 빨간 종이컵홀더에 winter coffee라고 쓰여 있어 가져왔다. 그대로 두면 분명 버릴 것 같아서.....

언젠가 화개장터 인도 샵에서 공짜로 준 향 한 상자도 놓여있다. 작은 향초들도 많아 그곳 문을 열면 그 많은 향들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신비한 향기가 난다.

해서 마지막 칸은 그냥 쌓여있다. 희한한 것은 그곳엔 계속 들어갈 공간이 있다.

유리창이 있어 비치는 상단보다 하단, 보이지 않는 공간은 더 북새통이다.

꼭 뭔가 필요한 시점이 되면 그곳을 열어 뒤지면 될 것이다.


둘째 칸에 결혼사진이 있다. 언제 봐도 낯선 사진이다.

늘 보이쉬하게 다녔던 젊은 날의 내가 드레스를 입고 화장을 한 거 자체가 너무 낯설어서 나도 보기 이상한 사진이다. 그 사진은 그곳에 수십 년 동안 놓여 있었다. 그런데 최근 아들이 그 사진을 처음 본다고 해서 놀랐는데 그 아이가 어렸을 때는 그곳이 높아서 보이지 않았고 그 사진이 보일 정도로 키가 큰 이후로는 그 노퍽을 보지 않고 다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곳이다. 노퍽은.

그곳의 문을 열면 모든 것이 뒤섞인 채로 혼재되어 있다. 모든 시간대의 기억들이 아무렇게나 놓여있다.

백일 때의 딸아이가 있는가 하면 초등 때 아들 유도하던 모습이 있고, 어느 적도지방 나라에서 우리나라에서는 입지 못할 옷을 입고 찍은 내 사진이 있고 후원하는 외국의 아이가 자라나는 모습도 있다.

시간이 뭘까.

나는 노펵의 문을 열고 내가 살아온 인생을 동시에 본다.

평행우주처럼 20대의 내가 아래칸에서 웃고 30대의 내가 위칸에 서있고 50대의 내가 가져온 빨간 컵홀더는 뒤늦게 왔지만 크게 존재감을 떨치고 있다.

인류 최초로 남극점을 탐험한 아문센의 항해선 속에서 나왔다는 못생긴 반 대머리 고릴라 인형이 뉴질랜드에서 온 키위새와 수다를 떨고 있다. 그 혹독했던 항해에서 우락부락한 남정네들이 저 털인형을 안고 두고 온 아이들과 집을 얼마나 그리워했을까 싶어 마음 찡해 사온 인형이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노란 상자는 살펴보니 술이다. 그곳에 서있는 이유를 모르겠지만 추운 밤에 고릴라와 키위가 한 잔 하길 바란다. 인도 향을 사르며 촛불 켜고서....


하단 서랍장은 문을 열 엄두가 나지 않는다. 문을 열면서 바로 역사가 쏟아져 내릴지 모른다.

어제부터 재택근무라 비교적 여유가 있어 음식들의 노퍽도 열었다.

냉동실에서 찾아낸 작년의 알밤들을 삶았다.

나는 노퍽에서 찾아낸 밤들을 맛있게 먹고 있다.

그리고 분실물 대장도 만들었다. 가능한 빨리 처치하려고....

언젠가 뭔가 잃어버린 것이 있는 것 같은데 뭔지 모르겠거든

곰곰이 생각하다가

'노퍽'을 열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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