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을 두 손으로 부여잡고 그 와중에 FM이 흐르는 핸드폰도 같이 쥐고 바람 속을 걷는다.
어제 오후 불현듯 집을 나섰다.
네비가 가르쳐준 대로 가면 늘 고속도로다.
무시하고 옛날길로 가면 계속 유턴하라고 외치던 네비가 어느 순간 포기하고 그냥 내가 가는 쪽으로 길을 펼쳐주는 시점이 온다.
남편의 마지막 임지, 구례를 향해 산길 사이로 가는데탄성이 절로 나와 창문을 내리고 간다.
순천에서 청소골을 지나 계족산을 넘어 구례 간전면에 이르는 길.
벚꽃은 다 져내리고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처럼 흔적만 남아있다.
지난주 올 수 있는 사람들은모두 다 와서 길을 메웠다는 섬진강길을 가니 비가 한 두 방울씩 내리기 시작한다.
분홍의 음영만 강둑 너머 줄을 지어 있고 나는 일부러 아주 느린 속도로 화개장터까지 가 본다.
그 며칠 사이로 꽃은 지고 거리도 비어있다.
고적하게 마치 발로 걷듯 차를 운전할 수 있다. 손님은 별로 없는 것 같지만 어쨌거나 가게들이 문을 열고 있는 화개장터를 지나 내가 좋아하는 인도 가게 앞으로 가니 문이 닫혀있다.문 열었으면 짜이나 라쉬 한 잔 하고 왕방울만 한 구슬이 달려있는 반지라도 하나 사려했더니.
온갖 보석과 향으로 가득 차있어들어서기만 해도 인도에 온 것 같은 가게.뭔가를 고르면 그 원석에 흐른다는 어떤 에너지에 대해 이야기 해주시는 주인도참 이국적이다.
실상 액세서리를 잘 안 하지만 가면 꼭 뭔가를 사게된다.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치솟지만 집에 가면 어디 둔지도 모르게 잊어버린다.
이제 아침마다 옷 차려입을 일도 없는데 사서 무엇하리만은 들어가면 터키석이나사파이어 블루 같은 색조들에 또 마음이팔랑일 것이다.
빗방울이 굵어져 남편 관사에 들어서니 바람도 세어졌다.
퇴근시간 지나 마을로 산책 가려던 남편도 바람 때문에 걷기 힘들어 들어왔다고 한다.
학교 안에 있는 관사에서 자면 평안하다.
고요가 일찍 내리는 시골, 이렇게 조용할 수 있나 싶게 고요한 밤이다. 정년이 일 년 남은 남편이 누릴 수 있는 마지막 호사다. 이렇게 아름다운 산골에서 사는 호사.
학교 뒤뜰엔 엄청나게 큰 배나무가 있어 꽃이 만개했다.
아침에 창을 여니 비는 여전하다.
남편 출근하는 거 보고 소포 보낼 책 두 권을 배낭에 담고 토지면우체국을 향해 걷는다.
비는 꽤 많이 내리지만 꿋꿋이 걷는다.
걷다 서다 하며 안개에 휩싸인 산과 섬진강을 본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곳은 구례다.
우체국에서 책을 보내고 동네 사이로 들어가 걷는다.
그냥 차로 스치기만 했던 마을을 이렇게 들어와 보는 것은 지나가는 객이 아니라 어쨌든 남편이라도 주민처럼 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곳에 오면 나도 주민이다. 하룻밤이라도.
지나가다 봐 두었던 길가 카페로 들어와 모닝커피와 빵을 먹는다. 아침도 거르고 걸었던지라 빵이 넘 맛나다.
많이 달지 않은 팥빵을 따뜻하게 데워주신다.
녹차가 들어간 쿠키도 담백하고.
커피를 연거푸 두 잔 마시고 우체국에서 들고 온 구례 책자를 읽는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쓴 정지아 작가가 이 동네 사는 모양이다. 나는 아직 그 책을 안 읽었지만 요즘 많이 읽히는 책이라 들었다.
구례에서 살까 보다.
가는 곳마다 여기서 살까 보다 한다.나는 이제 그럴 수 있다.
창문엔 빗방울이 흐르고 커피 향이 가득한 카페로 연신 사람들이 들고 난다.주인아주머니를 제수씨라 부르는 동네사람이 들어와 아침에 이빨 빼고 와서 아프다고 계속 푸념하는 것과 그 투정을 다정하게 들어주고 응대해 주는 모습을 본다.
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에 묻혀 하염없이 앉아 봄비를 본다.
더 걸어보자고 문척마을을 걷는데 희망슈퍼를 보니정겹다.
내 인생의 좋은 날들이다.
비바람에 옷이 젖는데도 이 노래가 흘러나와 세상의 경계가 흐려지는 어떤 곳을 걷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