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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where Jun 23. 2023

사랑하는 당신에게.

Last Dance

어제는 총체적인 문화의 날이었다. 내게.

이사 온 후로 거의 누군가를 만나는 일없이 하루를 보낸다. 그동안 맺었던 관계를 모두 두고 떠나왔기 때문이다.

그냥 조용히 별일 없이 시간이 흐른다. 청소하거나 뭔가를 먹고 산책을 좀 하고 나면 하루가 지나간다

그렇게 빠듯했던 시간들이 어찌 이리 수말스럽게 흘러간단 말인가. (수말스럽게는 ‘별일 없이 그냥, 쓰윽…’ 정도 뉘앙스의 전라도 말이다)


어제는 드디어 대학에서 하는 평생교육 프로그램 피아노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시골에서는 볼 수 없는 화려한 스펙의 강사진이다. 해외파 어나더레벨의 경력을 가진 선생님께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니 감개무량했다.

드디어 이런 날이 오는구나…

땀에 젖은 채 레슨이 끝나고 딸이 부탁한 레몬빵을 사기 위해 베이커리에 가서 내게 주는 상급으로 달디단 빵과 커피를 마신다.

피아노 레슨이 끝나면 그 충족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커서 그 어떤 사악한 빵도 죄책감없이 먹을 수 있다.


어얼리 티켓을 샀다가 일정을 맞추지 못해 날린 전시회를 다시 예약해서 갔다. 에드워드 호퍼의 <길 위에서>

요즘 오나가나 이 전시회 이야기다. 대체 왜 그러나, 미술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지만 가보기로 한다.

그림을 보기보다는 미술관 가는 것을 좋아한다. 그냥 미술관 어느 구석지나 그림 앞 소파에 앉아 그림을 보는 척 하염없이 쉴 수 있어 좋고 또 미술관은 대체로 쾌적하고 아름답다.

미술애호가들에게는 경악할 만한 소리겠지만 해외여행 중 미술관은 내게 편안하고 교양 있는 휴식처다.

절대로 해설 오디오 같은 것을 빌리는 일은 없고 사람들이 많이 붙어있는 그림들은 멀리서 스윽 지나며 본다.

그러면서 스스로 직관적으로 그림을 본다고 생각한다. 그 그림을 그린 시기나 배경, 작가의 개인적 사유는 굳이 애써 알려하지 않는다.


그냥 본다.


그런데 어제는 제법 그림을 가까이서 자세히 봤다. 호퍼는 단조로운 건물 그림도 많이 그렸는데, 가령 집 한 채, 건물 한채 이런 그림들이 있다.

이상하게 그 그림들이 마음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집의 담이나 뜰, 숲, 하늘을 계속 보다 보니 처음엔 한 장의 사진처럼 보이던 것에 무수히 많은 색채와 붓질이 있는 것이 보인다. 하늘도 어느 한 부분 같은 색이 없다. 그저 노란색 담으로 보이는 그 담안에도 무수히 많은 노란이 섞여있고 터치가 있다. 마치 그 사실을 처음 알게 된 듯 화폭의 모든 부분을 유심히 봤다.

우주의 모든 물질이 원자로 이루어져 있고 그 원자 또한 고정된 것이 아니라 계속 움직이는 어떤 것이라는 것처럼 그냥 초록의 숲이라 보였던 속에도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초록들이 어우러져 크게는 숲이지만 미세하게는 그저 초록 점들의 놀라운 덧입힘들로 되어 있다.

세상 모든 물질에 고정된 것은 없고 모든 게 흘러가는 유동성이라고 했던 것을 갑자기 그림을 보며 생각하니 모든 그림이 다 점들의 흐름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상한 환시들ᆢ

 덧없지만 확고한 이 세상 같다. 

지금 너무 분명한 물질인 내 손가락도 무수한 분자 원자들의 결합과 움직임으로 있다가 어느 순간엔 흩어질 것이다.


한 동안 호퍼는 손을 많이 그리기도 했다.

작품완성하기 위한 작은 스케치 연습들도 전시되어 있다.

마치 피아니스트들이 긴 곡의 한 두 부분을 집요하게 연습하는 것처럼 큰 그림 중 작은 부분들을 세밀히 연습한 것이다.


시간의 흐름 속 스치는 무수한 장면과 사물 중 화가는 어느 순간을 잡아서 그리겠다고 결정하게 되는 걸까.

한 개인의 인생 속에 흐르는 그 영겁의 순간 중 어느 순간을 잡아서 남기는 것일까?

정확한 우주의 역사를 알 수는 없지만  인간의 시간도 그 사람에겐 영원에 가깝다. 시작도 모르고 끝도 모르기에…

나는 내 시간 중 어느 장면을 남기고 싶을까.


파리나 뉴욕의 환한 대낮을 그려놓아도 이상하게 호퍼의 그림은 적막하고 고요하다. 창틀옆으로 건물옆으로 드리워진 빛의 그림자들 적막함을 드러내는 듯하다. 사람이 보이지 않는 집, 골목을 돌아가다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집을 보는 듯한 느낌.

언젠가 어디선가 만난듯한 장면들 같아 기묘하게 사람을 끄는 그림들이다.

<아침 7시>란 그림, 아침 7시의 고요하고 텅 빈 시간이 보인다.


이 날의 마지막 여정.

미술관을 나와 정동길을 걸어 극장에 가서 <사랑하는 당신에게>라는 영화를 봤다.

따스하고 아련한 영화다.

급작스럽게 죽은 부인 리사가 마지막까지 가장 즐겁게 하고 있던 춤을 본인이 마무리 짓기 위해 시작하는 늙은 제르맹의 몸짓이 엉뚱하고 멋지다.

어떻게 저렇게 배가 튀어나오고 걸을 때마다 숨이 가쁜 노인이 춤을 추나 싶지만 결국 음악과 어우러지면서 그 별것 아닌 몸짓이 의미를 고 멋있어지고야 마는 프랑스 영화다.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그 사람들의 움직임이 잔잔하고 좋다.

이 영화에 잠깐 언급되는 프로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전권 받을 수 있는 응모전이 있었나 보다.

1권 <스완네 집으로>를 읽고 득의만만했는데 13권이 더 남아있었다.

오래 살아야겠다. 1권 읽는데 30년 걸렸으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다 읽어보고 싶다. 그러려면 갑자기 우주적 재앙이 와서 전기가 끊기고 핸폰도 소멸하고 그저 세상에 그 책과 나만 남아있어야 한다.


몰래 숨기며 혼자 춤을 추던 제르맹의 공연을 결국 가족들이 같이 보면서 서로를 알아주고 받아들인다. 과하게 아버지 걱정을 하며 보호하기에 급급했던 아들도 비로소 아버지가 춤을 추면서까지 그리워하는 그 절절한 사랑을 보게 된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내내 흘렀던 <오 솔레미오>를 들으며 눈물 한 방울 흐르고 엉뚱하게 나는 수행평가를 생각했다.

지금 내가 퇴직하지 않았다면 저 노래를 이백번쯤 듣고 있을 것이다.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는 노래, 애들도 이상하게 좋아하는 노래, 긴 복도를 따라 걸으며 밤에도 크게 부르던 아이들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노래하는 아이들 사이를 다니며 같이 부르던 그 시간들이 갑자기 떠오른다.

내가 내 인생 그림으로 한 컷 남긴다면 그 순간일까ᆢ


햇살처럼 따스한 사랑이 인간 사이에서 언제나 노래처럼 흘러 다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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