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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where Dec 18. 2021

길을 걷는다.

길이 있어 걷는다

아주 오랜 세월 좋아하는 노래가 있다.

문득 문득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 길을 걸었지 누군가 옆에 있다고 .....


처음 읊조리듯 시작하는 선율과 노래하는 이의 목소리가

외로이 펼쳐진 긴 길을 보는 듯 해서 좋아했다.

요즘 어떤 유명드라마에 다시 등장하는 걸 들었는데 가수가 아닌 아마츄어가 불러도

여전히 쓸쓸하고 여전히 애잔한 음색이었다.

그냥 노래 자체가 그런 음색을 지닌건지 모르겠다.

길을 걸었지 ...하고 노래가 시작되면 마음속에서 길이 한줄기 길게 드리워지는 것 같다.


한동안 해가지는 무렵에 걷는 것을 무척 좋아했는데 요즘은 낮에 걷는다.

어쩌다 해가 지는 것을 볼 때 혹은 운전 중에 노을이 지는 하늘을 보면

차를 어디든 세우고 걷고 싶어 안달이 났다.

노을이 깔린 그 배경속으로 걸어들어가고 싶어서.

그 해가 얼마나 순식간에 산너머로 지는지 알기에.


요즘은 낮에 걷는다.


여름엔 해가 져도 천천히 어둠이 오는데

겨울엔 금방 어두워져서 노을을 만끽하러 들판을 걷다보면

돌아올 때가 조금 무섭다.

인적없는 농로 한 가운데서 어둠을 맞이하면.

언젠가는 그 농로길을 너무 오래 걷다가 들개들한테 휩싸여서 바들 바들 떤 적도 있다.



오후 5시에 들판에 나가면 곧 이렇게 어두워진다. 바로.



- 즉 오후 산책 한 번의 거리 안에 있는 풍경이 보여줄 수 있는 것들과 70년이라는 사람의 한평생 사이에는 실은 공통점이 하나 있다.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   <걷기의 인문학> 중에서


매번 가는 길인데도 어둠이 깊어지면 지푸라기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흠짓 놀라기도 한다.

내 옷깃 스치는 소리에 자꾸 뒤를 돌아보기도 하고.

하루 하루 같은 장소를 걸어가는 데 하루도 같은 날이 없다.

천변옆 갈대 움직임이 다르고 퍼져가는 물결이 다르고 바람이 다르고 차가움이 다르다.

단 하루도 익숙하게 같은 날이 없다.


- 풍경속을 지나가는 일은 생각 속을 지나가는 일의 메아리이면서 자극제이다.

마음의 보행과 두 발의 보행이 묘하게 어우러진다고 할까.

마음은 풍경이고, 보행은 마음의 풍경을 지나는 방법이라고 할까.

마음에 떠오른 생각은 마음이 지나는 풍경의 한 부분인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는 일은 뭔가를 만들어내는 일이라기보다는 어딘가를 지나가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 <걷기의 인문학>


두 발로 걸을 때, 마음도 같이 걷는다.

발길 닿는대로 목적없이 걸을 때, 마음도 정처없이 아무데로나 흘러간다.

내 옆에 지나가는 풍경처럼 마음이 풍경이고 걷기는 마음의 풍경을 지나는 방법이라고 하니...

표현이 너무 멋지지 아니한가.

유난히 겨울에 걷는 것을 좋아하니 내 마음은 겨울 풍경이고 나는 그 마음의 겨울을 지나는 것을 좋아하는 건지 모르겠다. 마음의 겨울이라....

텅 빈 그리고 꽉 찬 고독을 마음의 겨울이라 생각해본다.

혼자 걸을 때 느껴지는 그 텅비고 꽉 찬 느낌.


- 생각하는 일은 뭔가를 만들어 내는 일이라기 보다는 어딘가를 지나가는 일인지도 모르겠다.-<걷기의 인문학>


나는 어디쯤을 지나가고 있나.

참으로 많은 길을 지나왔다. 지금은 어디를 지나가고 있나.

여전히 괴로움이 있고 슬픔은 갈수록 농밀해진다.

괴로움과 슬픔과 더불어 같이 공존하는 평안이 있다.

깊은 슬픔은 존재의 베이스 같다.

외면하지만 않는다면 우리 심연속 그 깊은 슬픔을 보게 될 것이다.

사람을 피폐하게 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에 대한 이해와 긍휼을 갖게 하는 슬픔.

슬픈 사람이 슬픈 사람을 위로하고 껴안아 줄 수 있듯

그 깊은 심연속 슬픔을 아는 사람은 인간을 연민할 수 있다.

사람을 쨘하게 볼 수 있는 사랑.


- 곶 산책이 끝날 참이었고, 나는 무엇을 써야 하고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깨달았다

대략 10킬로미터를 걷기 전에는 없었던 깨달음, 순간적 에피파니가 아닌 점진적 확신이었다.

공간이 파악되듯이 의미가 파악되었다. 한 장소를 파악한다는 것은 그 장소에 기억과 연상이라는 보이지 않는 씨앗을 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장소로 돌아가면 그 씨앗의 열매가 기다리고 있다.

새로운 장소는 새로운 생각, 새로운 가능성이다.

세상을 두루 살피는 일은 마음을 두루 살피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세상을 두루 살피려면 걸어 다녀야 하듯, 마음을 두루 살피려면 걸어 다녀야 한다. - <걷기의 인문학>


세상을 읽기 위해서 걷는다는

또 마음을 두루 살피려 걷는다는

사람들.


나는 그저 길이 있어 걷는다.

길만 보면 걷고 싶다.

하지만 아주 오래 걷지는 못한다.

갔다가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지점까지만 걷는다.

다시 돌아와 문을 열고 들어와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지점까지만.


해가 아주 천천히 지면 좋으련만.

winter is coming.

오늘 2021.12.02 한 낮 점심을 먹고 또 걸었다. 오늘은 들판이 아닌 다른 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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