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mewhere Dec 18. 2021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고독의 바닥.....


오래전에 차에서 음악을 듣고 가다가 남자 목소리가 들려와서 운전 중에 밖을 내다본 적이 있다. 분명 남자가 뭐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었다. 그것도 차창을 뚫고 들어온 소리라면 분명 밖에서 큰 소리로 질러대는 소리일 거라 생각되어 긴장하며 창밖을 두리번거렸었다.

가만 보니 그것은 듣고 있던 음악 속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연주하면서 피아니스트가 따라 부르는 낮은 허밍 소리였다. 언제 사놓았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 제대로 들어보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나 보다.

그리고 그 음반을 거의 일 년이 넘도록 꺼내지 않고 들은 것 같다. 그렇게 질리지 않은 음악은 처음이었다.

그 음반이 글렌 굴드의 골든베르크 변주곡이었다. 또 바흐 인벤션 음반도 그랬다. 바이엘 끝나면 흔히 치는 바흐 2성 인벤션이 그렇게나 명징하게 아름다운 곡일 줄이야.

나는 다른 연주가가 연주한 바흐 골드베르크 곡을 들어본 적이 없으니 비교해서 굴드가 얼마나 탁월한지 이야기 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굴드의 골든베르크가 지극히 아름답다는 데는 주저 없이 동의한다. 그의 행적에 대해서도 에피소드 몇 들어본 정도였는데 책을 통해서 본 굴드는 내가 알던 것보다 훨씬 기이한 사람이었다. 이해될 듯 말 듯한 사람이다.

미셀 슈나이더 책은 너무 주관적으로 쓴 책이어서 참 읽기가 어려웠다. 그냥 객관적인 사실만 나열된 전기였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나처럼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만약 주변에 굴드 같은 사람이 있었다면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또 만약 뭔가 내가 하는 일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골치 아파했을지 모른다. 십중팔구 그랬을 것 같다.

특이한 사람들이 나와 먼 세계에 있을 때는 특이한 그대로 봐줄 수 있지만 내 가까이 있고 나와 관계가 있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굴드도 마찬가지 우리에겐 기이하고 천재적인 음악가이지만 아마 그의 주변에선 견디기 힘든 사람이었을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연신 저런 쯧쯧쯔 하며 읽고 있는 나를 본다. 뭔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판단. 왜 사람과의 교감을 두려워하게 되었을까? 왜 건강염려증이 생겼을까? 왜 이렇게 내면에 두려움이 꽉 차게 되었을까?

그러다 문득 정상적인 것이 뭘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 모두 다들 마음속에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지 않나. 오히려 굴드는 그 두려움을 여과 없이 다 드러낼 정도로 눈치 보지 않는 자신감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눈치 보느라, 세상과 주변 사람들을 의식하며 남달리 보일까 봐 두려움도 감추며 살고 있을 때가 많다. 세상엔 그냥 다 뭔가에 의해 주눅 들거나 두려워하거나 수치심에 찬 사람들이 가득하다. <정상>이라는 개념 자체가 인간에게는 맞지 않는 것인지 모른다.   

 

책을 통해 본 굴드의 세계를 한 단어로 나타낸다면 ‘고독’이 아닐까 싶다.

고등학생 시절 캐나다 북쪽 지방 호숫가 가족의 오두막에서 혼자 지낼 정도였다면 고독으로부터 충만해지는 내공이 있는 참 강한 사람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 어떤 포장도, 장식도 없이 핵심으로 곧장 내려가는 고독을 알기에 그렇게도 세상을 못 견뎌하지 않았을까? 피상적이고 얇게 흘러가는 인간사나 세상사에 합류할 수 없었던 것 아닐까?    

책 중간에 나온 T.S 엘리엇의 시 구절이 굴드의 세계를 잘 나타내 준 것 같다.

        

Descend lower, descend only.                   내려가라, 보다 낮은 곳으로, 오직

Into the world of perpetual solitude,        영원한 고독의 세계로    


그 깊은 고독의 세계에서 생명의 충만함을 만났더라면 그렇게까지 세상에 대한 많은 알레르기를 갖지 않게 되었을 텐데.

이 세상의 얇고 피상적이며 상투적인 삶은 싫지만 또한 내면의 고독 가장 깊은 바닥에 있는 본체, 근본에는 다다르지 못해 그 어느 세계에도 편입되지 못한 사람이 굴드 아닐까?     

현실적인 세상에 뿌리내리고 세상이 다 인 것처럼 받아들인 사람은 애면글면하면서도 잘 살아갔을 것이고, 현실을 살면서도 초월적인 어떤 세상을 받아들였다면 또 그 나름의 균형감을 갖고 살아갔을 것을, 굴드는 틈새에 끼인 존재처럼 살다 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의 음악이라 할 수 있는 경건한 바흐를 그 누구보다도 잘 연주하면서도 시대에 앞서서 주식 투자도 할 줄 알았던 굴드.

두 세계를 오가다 두 세계의 통로에 끼어 양쪽에서 다 닫혀버린 문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

자신을 초월하려다 자신에 갇힌 사람.

지옥의 또 다른 이름. 자아.    

우린 모두 편린처럼 여러 모습들을 가지고 산다.

하지만 시간을 살아가면서 점점 어느 한 곳으로 모아지는  방향성을 갖게 된다.

종교인으로서 나는 자신을 벗어날수록 진정한 평안으로 가게 된다고 믿는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스스로 자신을 벗어날 수가 없다.    


흔히 학구적이고 정열적이며 재능 있는 사람들이 그러하듯 굴드는 자신의 벽에 갇혔는지 모른다. 좌절을 알기에는 재능이 너무 뛰어났고, 침잠하기에는 너무 열정적이었고, 고독을 좋아하지만 완벽히 고독하기엔 연약한….    


차라리 깊이 좌절했다면 자신의 한계를 봤을 텐데…

좌절보다는 알레르기 반응처럼 자신을 지키기 위해 과도한 방어만 하다 스러진 사람 같다.

멸균된 진공의 공간에서 살고자 고군분투하며 동시에 자신에게서 울려오는 소리를 남에게 들려주고 싶어 두려움에 떨며 진공 밖으로 손을 내밀어야 하는 사람.

내게는 그런 모습으로 굴드가 그려진다.    


굴드는 삶 전체에서 어머니의 보살핌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세상과 접촉을 두려워한 것은 어쩌면 그 어머니의 양육 태도에 기인했을지 모른다. 세상과 인간을 마치 전염균이 가득한 오점처럼 보기도 하지만 누군가와 소통하며 교감하기를 바라기도 한다.


세상은 피상적이고 부조리하지만 또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그렇게 보이지만, 그 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등지고서는 아무런 해답도 구할 수 없다.

그 어떤 위대한 도나 진리도 이 세상 속에서 사는 가운데 찾는 것이라 생각된다. 세상과 유리되면 다만 관념이요 다만 허상이 되기 쉽다.

고통과 슬픔을 토로하며 현실과 접점을 찾지 못해 괴로워하며 산 많은 예술가들도 있지만, 인간이 처한 그 본연의 고통 가운데서 뚜벅뚜벅 살아가며 위대한 극복을 이야기한 베토벤과 도스또예프스키 같은 예술가들도 있다.    


나도 굴드처럼 연주회를 좀 불편해하는 사람이다. 괜히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누군가의 움직임 소리 기침소리에 예민해져 음악에 집중하기가 불편해 그냥 오디오로 감상하는 것을 좋아한다. 오디오로 듣는 음악은 완벽하다. 방해하는 요소도 없다. 사운드는 가장 정제된 상태로 나온다.

어찌 보면 음악의 진공관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굴드의 눈으로 보자면 균이 득실거리고 서로의 침이 튀기고 입김이 오가는, 누군가의 손 때가 묻어있는 의자를 만지며 왜 사람들은 연주회를 가고 왜 끊임없이 연주회는 기획되며 열릴까?


불편해하던 연주회에서 끝내는 감동을 받으며 돌아오는 날이 많았다.

연주자의 손 끝에서 직접 떨어지는 그 음들을 들으며 그들의 땀과 영혼이 버무려진 시간을 공유하며 눈물이 떨어지기도 한다. 또한 연주자의 입장에서는 누군가에게 들려지고 가 닿는다는 카타르시스, 청중들과의 교감에서 받는 에너지는 그 모든 고통과 노고를 상쇄하고도 남을 것이다.    


세상은 이렇게 주거니 받거니 살아가는 것이다. 아무리 전염병이 창궐한다고 해도 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