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룡동의 기억 한 조각

by 경자의 서랍



나는 오룡동에서 두 번을 살았다. 우리 집이 처음 천안에 이사 왔을 때 남산이 있던 원성동 근처에 자리를 잡았었고 그다음 두 번째로 이사한 곳이 오룡동이었다. 그리고 여기저기 셋방을 돌고 돌아 내가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이사 간 곳이 다시 오룡동이었다. 처음 살던 곳과는 불과 백여 미터 떨어진 곳이다. 이곳에서 가장 오래 살았다.


대문을 열면 하수도를 복개한 제법 넓은 길이 있었고 꽃도 팔고 꽃꽂이를 가르치던 집이 맞은편에, 작은 슈퍼 연탄집. 그리고 식육점을 겸한 고깃집도 있었고 모퉁이에는 자전거를 수리하던 자전거포가 있었다. 근처에는 세탁소와 큰 규모의 방앗간, 쌀집, 이발소, 그리고 우리 집 뒤 좁은 골목 안에는 작게 간판이 붙은 여관도 있었다. 나는 지금도 눈감으면 그곳 골목 풍경들과 냄새, 오룡동 집의 오래된 벽지 색깔까지도 다 떠오른다. 잊히고 싶은 기억까지도 덤으로 생생하게...






오룡동 기억 중 하나는, 내가 아침이면 정해진 일과처럼 쓰레기를 버리던 일과 쓰레기차가 틀고 다니던 '새마을 노래'가 떠오른다. 70년대 중반이었다. 초록색의 차는 지금 쓰레기차와 기능은 달라졌겠지만 외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전 9시쯤이면 쓰레기차가 큰길을 통과했다. 그 차는 확성기를 통해 '새마을 노래'를 크게 틀고 다녔다. 일정한 시간에 지나가는 차에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서는 큰길을 통과하며 지지직 거리는 잡음과 함께 들리던 새마을 노랫소리를 놓치면 안 되었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너도 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익숙한 노랫소리가 '약국'근처쯤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면 나는 부리나케 쓰레기통을 들고나갔다. 내가 바로 우리 집 쓰레기 당번이었던 까닭이다. 나는 무거운 통을 질질 끌다시피 들고나갔다. 연탄으로 난방을 하던 때였으므로 연탄재가 쓰레기의 대부분이었고 김치라도 담은 날이면 쓰레기 통은 제법 묵직했다. 일요일은 차가 오지 않았으므로 월요일에는 쓰레기가 다른 날보다 많기도 했다. 서는 곳은 항상 '자전거포' 앞이었다.



자전거포 아저씨는 허리가 반으로 굽었었다.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했지만 젊은 시절 다쳐서 그렇다는 말을 들었다. 하루도 문을 닫은 적이 없을 정도로 성실하고 부지런했다. 새 자전거를 팔기보다는 고장 난 자전거를 주로 고쳤다. 구부린 허리로 손톱밑이 항상 까만 채로 기름이 묻은 걸레를 들고 분해된 자전거를 만지던 아저씨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우리가 그곳에서 이사 나오기 전에 아저씨가 아파서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얼마 안 가 자전거포는 문을 닫았다.





쓰레기통은 집집마다 오래 써서 구멍이 난 양은 들통이나 바닥에 금이가거나 오래된 고무 다라이 등을 사용했다. 우리 집은 중앙시장 그릇집에서 타이어를 잘라 꿰맨 것 같은 재질의 고무통에 손잡이까지 제대로 달린 것을 사서 쓰레기통으로 썼다.



쓰레기차는 일정한 코스로 다녔지만 버려지는 쓰레기 양은 늘 일정하지 않았다. 차의 뒷문은 세 단계의 문이 있어서 쓰레기의 양에 따라 문이 닫히는 단계도 달랐다. 어떤 날은 내가 손으로 쓰레기통을 들어 올려 버릴 수 있었지만 2단계의 문이 닫힌 날은 쓰레기차를 타고 다니는 두 명의 아저씨가 내려서 쓰레기 통을 위로 던졌고 위에 있던 아저씨가 받아서 내용물을 쏟아내고 빈 통을 아래로 던졌다. 김장철처럼 쓰레기가 많아서 맨 위에 문까지 닫히는 날에는 던져진 통이 떼구르 구르면서 그 바람에 깨지거나 더 찌그러지기도 했다. 우리 집 쓰레기통은 고무로 만들어져서 던져져도 탄력을 받아 통통 튕기다가 말았다.


'거 참 살살 던지야지..'

'쓰레기통을 새루 장만하라는 거 아녀유'

'쓰레기통이 바루 쓰레기구먼'


멀리 나가떨어진 쓰레기통을 주우며 농담으로 한 마디씩 하고 헤어졌다. 집 앞이라서 대부분 옷차림도 아저씨들은 난닝구를 입고 나오거나 파자마 바람이기도 했다. 내가 힘에 부쳐 보일 때면 우리 쓰레기통을 대신 들어 올려 버려주기도 했다.


나는 처음에 쓰레기를 버려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하게 싫었다. 쓰레기차는 항상 오전 9시쯤에 왔고 그때 친구들은 학교에 가고 없을 때였다. 학교에 가 있을 시간에 어른들 틈에서 쓰레기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 부끄럽고 창피했다. 예민한 시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엄마말에 토를 달 수는 없었다. 그렇게 쓰레기 당번노릇은 오래 이어졌다.



(지난주에 찍은 오룡동 옛 집이다. 화살표가 내가 살던 곳이다. 흔적은 다 사라져 내 기억 속에만 있다 )



지금 그곳 오룡동 사람들은 다들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가끔 궁금하다. 이제 세대교체가 되어 엄마 또래 어른들은 몇 분 남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옛사람들을 마주칠 때가 있지만 그들이 먼저 알아보기 전에 절대 내가 먼저 알은체를 하지 않는다. 깊게 뿌리내린 열등감이 주저하거나 외면하게 만드는 것이다. 매일 야단맞고 내 쫓기고 골목을 빙빙 돌던 원성동에서의 일상을 그대로 이어가던 오룡동 시절이었다.


지난주에 시장에 갔다가 차를 옛 집 근처에 세웠다. 그리고 한 바퀴 돌아보았다. 80년대까지 살던 곳이지만 시간은 그곳만 훑고 지나갔는지 옛 자취를 찾기는 어려웠다. 낡은 집을 헐고 원룸을 지은 곳이 많았고 더러 남아있는 집들은 몰락해 가는 시골동네처럼 비어있거나 낡은 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길만 또렷이 남아있는 그곳에서 나는 갑자기 코끝이 아려왔다.






고려가 망한 후 길재선생이 한 필의 말을 타고 옛 도읍지 개성을 지나면서 왕조를 그리며 읊은 시가 있다.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依舊)하되 인걸은 간데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국민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던 시가 지금까지 생각나는 것도 신기하지만 지금은 '사람은 그대로인데 옛집은 간데없네'로 바꾸어야 할 것 같다. 무엇이든 빠르게 변하는 시대가 되었다.


골목으로 들어갈수록 빈집이 많은 옛 동네를 한 바퀴 돌면서 생각이 많아진 흐린 주말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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