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꽥 꽥꽥꽥 꽥.."
내가 사는 집 옆에는 유치원이 있다. 유치원에는 넓은 잔디마당이 있는데 이곳 한편에 거위 한 마리를 키운다. 우리 집은 19층이다. 나는 매일 이 녀석의 '꽥꽥'거리는 울음소리에 잠에서 깬다. 소리는 위쪽으로 올라온다고 하는데 정말 그런 모양인지 제법 이른 시간 날이 환하게 밝아오는 때면 어김없이 녀석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들린다.
나는 이 울음소리가 신경 쓰인다. 시끄러움 때문이 아니다. 녀석이 배가 고파서 우는 건 아닌지 싶은 것이다. 유치원에서 키우는 것이니 어련히 알아서 잘해줄까 생각하면서도 주말이면 선생님들이 출근을 안 했을 것 같아 그때는 더 신경을 쓴다.
내가 볼 수 있는 쪽은 판자로 막혀있어 판자사이 좁은 틈으로 하얀 털을 가진 거위가 한 마리 있다는 것만 보일뿐이다. 더 가까이서 볼라치면 이 녀석이 낯선 이를 경계하면서 시끄럽게 울어대는 통에 가까이서 오래 관찰할 수가 없다. 새벽이 오면 수탉이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울듯이 거위도 그렇게 날이 밝았음을 알리는 울음이기를 바란다. 낮에 조용한 것을 보면 내 걱정이 기우인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믿고 싶기도 하다.
살짝 욕심을 낸다면 한 마리가 더 있어 짝을 맞추어 주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더 시끄러울 수 있겠지만 그 소리는 두 마리가 사이좋게 놀면서 내는 소리로 들릴 것 같아서다. 혼자보다 얼마나 의지가 되고 든든하겠나 싶다.
(오래전 과수원에서 키우던 거위와 고양이 '장이')
내 차에는 마트에서 두부를 사면 생기는 사각 플라스틱 통 몇 개와 고양이 캔, 그리고 사료와 생수를 항상 싣고 다닌다.
밖에 나갔다가 주차를 할 때면 가끔 그곳 근처에 사는 듯한 고양이들을 마주 할 때가 있다. 대부분 고양이들은 재빠르게 도망가거나 차 아래로 숨는다. 그중 유난히 작거나 비쩍 마른 녀석이 눈에 보이면 가지고 다니던 빈 사각통에 사료와 물과 캔을 따서 그늘지고 한적한 곳에 놔주곤 한다. (그런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은 안다)
한 끼라도 맛있는 밥을 배부르게 먹었기를 생각하면 무슨 봉사활동에라도 다녀온 것처럼 그날 오후는 마음이 넉넉하다.
2023년에 아기를 태우고 다니는 유모차보다 반려견을 태우고 다닐 수 있는 속칭 '개모차'가 더 많이 팔렸다는 뉴스를 들었다. 그것이 벌써 2년 전 이야기니까 지금은 그때보다 더 많이 팔리고 있을 수도 있다.
애견동반이 가능한 백화점이나 아웃렛에 가보면 정말 많은 개모차와 반려견을 동반한 모습을 보게 된다. 잘 관리된 개들은 크기와 종을 불문하고 하나같이 눈길이 갈 만큼 예쁘고 사랑스럽다.
나는 개와 고양이를 모두 좋아한다. 떠돌이 개는 요즘 볼 수없기 때문에, 나는 아프거나 다치거나 길에서 사는 고양이들에게 관심이 많다. 주인이 있고 사랑과 정성으로 키우는 반려견이나 반려묘들은 내 관심대상이 아니다. 그들에게 나는 필요 없으니까.
조카도 반려묘 두 마리를 키우고 있고, 일찌감치 '딩크'를 선언한 작은아들도 반려묘를 무려 4마리나 키우고 있다. 가보면 거실의 반 이상을 그들의 물건이 자리하고 있다. 캣타워에 모래 화장실, 스크래치에 동굴놀이터. 캣휠에 해먹, 간식그릇과 자동 사료급식기까지 아기용품만큼이나 다양하고 많다. 털이 많이 빠지니 청소기와 털을 떼어내는 장비도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다.
나는 입고 간 검정옷이 고양이털로 범벅이 되어도 개의치 않을 만큼 그들이 사랑스럽지만 그래도 내 관심은 소외된 길 고양이 들이다.
날씨가 덥거나 춥거나 가뭄이 길게 가거나 장마가 심할 때, 나는 길고양이들을 걱정한다. 특히 가뭄이 심할 때 더위에 깨끗한 물을 마실 곳이 없을까 신경 쓴다.
"걱정두 팔자다. 내가 지난번에 보니까 사람들이 먹다 버린 아이스아메리카노 얼음 녹은 물 마시고 있더라. 다 알아서 찾아 먹는다니까"
"너는 너무 쓸데없는 걱정을 많이 하는 거 같아, 사람도 고생하다가 돈 없으면 죽기도 하는 세상인데.. 그깟 짐승쯤이야 뭐"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내가 지나치게 동물들을 '의인화'한다고 걱정한다. 그럼에도 '그깟 짐승쯤이야'라고 하는 말은 조금 잔인하게 들린다. 맞는 말일지 모르지만 '그깟 이별쯤이야' '그깟 상처쯤이야' '그깟 문제쯤이야'라고 하는 말에는 뭐든 자신의 일이 아니면 하찮게 생각하는 마음이 느껴져서다. 위안이 안 되는 말들이다.
나도 고양이 한두 마리 정도 키우고 싶지만 그것이 아프거나 죽었을 때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선뜻 데려오지 못한다. 내가 마지막 키운 고양이는 열여섯 해를 살고 떠났다. 지금 고양이를 데려다가 지금부터 열여섯 해를 또 보살필 수 있을지 예측할 수 없는 노릇이니 함부로 데려올 수가 없는 것이다.
예전에 주택에 살 때는 밥을 챙겨 주면서 눌러살게 된 고양이들이 열 마리도 넘었었다. 남편이 아프고 병원에 있는 2년여 동안 집이 헐리고 아파트가 지어지면서 그들도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졌는지, 나 혼자 집에 돌아온 날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얼룩이, 꼬마, 똘똘이, 삼순이와 세 마리 새끼들, 장군이와 노랑이.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긴 했지만 책임을 다 하지 못한 거 같아 지금도 생각하면 마음이 불편하다.
나는 세상 모든 고양이가 배부르고 깨끗한 물을 마시며 따뜻하게 살기를 바란다.
참 무용(無用)하지만 무해(無害)한 경자의 오지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