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기 우체부를 알게 된 것은 예능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록>을 통해서다. 신묘한 씨앗 사전 특집에 나온 온기 우체부 노기화님은 20년째 세상에 따뜻한 온기의 씨앗을 심는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온기 우체부는 한 청년이 세운 온기 우체통에서부터 시작이 되었는데 그는 군대에서 책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읽고, 온기 우편함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한다. 위로가 필요하지만, SNS에 고민을 올리자니 공개적인 공간이라 조심스럽고 또 가까운 사람들에게 얘기하자니 해결책만 줄 것 같은 그런 이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주기 위해 그는 2017년 서울 삼청동에 첫 온기 우편함을 세웠다. 그리고 지금까지 온기 우편함으로 도착한 익명의 고민 사연에 온기 우체부들은 9000통 이상의 손편지 답장을 보냈다고 한다.
출처 온기우편함 홈페이지
온기 우체부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손편지를 받는 사람의 마음을 떠올려봤다. 마치 어릴 때 자고 일어나면 머리맡에 놓인 크리스마스 선물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뻐하는 그들의 얼굴이 그려져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렇다면 편지를 쓰는 온기 우체부의 마음은 어떨까? 이 역시 익명의 누군가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할 수 있다는 것에 행복감이 충만하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노기화님 역시 그 힘으로 20년째 온기 우체부를 이어오고 계신 듯했는데 사실 나도 이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다. 누군가를 위해 선물을 고르고, 주는 기쁨을 말이다.
시작은 이랬다. 3년 전 연말, 고된 육아 전선에서 함께 싸워나가고 있는 동지들을 위해 깜짝 선물을 준비한 적이 있다. 사전계획이 전혀 없었던 즉흥적인 것이었다. 선물을 받을 동지들은 내가 육아로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힘들 때도 곁에서 항상 위로해주던 이들이었다. 남편의 발령으로 내가 멀리 이사를 하였을 때도 수화기 너머로 힘을 주던 정말 고마운 육아 동지들. 나는 그들에게 그동안 하지 못했던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었다. 특별히 연말에 선물을 준비한 것도 다 이유 있는 선택이었다. 연말이 다가오면 평소보다 들뜨는 사람들과 달리 엄마들은 더 바빠진다. 아이의 크리스마스 선물은 무엇으로 할지, 올해의 마지막 날은 어디서, 어떻게 보내야 아이에게 더 좋은 추억을 남길 수 있을지 온통 아이 생각으로 가득한 시점이 바로 연말이다. 고민으로 며칠을 골머리를 앓다 보면 갑자기 내가 없어진 기분이 들고, 나를 가장 우선으로 했던 그때가 그리워 마음이 헛헛해질 때가 있다.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있던 나는 그녀들의 헛헛함을 사전에 방지하고자 연말에 깜짝 선물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어떤 선물이 좋을까 며칠을 고민했다. 고민 끝에 책을 선물하기로 했다. 작지만, 가장 가치가 높은 것 그게 내 기준에는 책이었다.나는 그동안 읽은 책 중에 가장 감명 깊었고, 육아 동지들이 꼭 읽어봤으면 하는 책을 떠올려봤다. 그리고 각자의 상황에 맞는 책을 보내기 위해 심사숙고한 끝에 네 권에 책을 고를 수 있었다. 아이들을 어느 정도 키워놓고 이제는 자신의 미래를 고민하는 꿈 친구 호정언니와 25년 지기 친구 미화, 나영이에게는 엄마들이 다시 꿈을 꾸고 그 꿈을 실현해나가는 내용을 담은 책을, 둘째가 태어나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있는 사촌동생 민주에게는 양육서를 보내기로 했다.
익명으로 육아 동지에게 선물을 발송하던 날, 나는 오랜만에 행복한 기분을 느꼈다. 책이 도착하고 가장 먼저 연락이 온 것은 호정언니였다. 촉이 좋은 언니는 선물이 익명으로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단번에 내가 보낸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 이유는 주변에 책을 선물할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미화에게도 전화가 왔는데 여전히 추리 중인지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나한테 책 보냈어?”
친구의 반응이 어찌나 재미있는지 나는 그런 적이 없다고 장난을 치고 말았다. 미화는 선물을 보낸 사람을 앞에 두고도 여전히 발신인을 찾고 있었는데 나는 그만 웃음이 터져 내가 보낸 것이라 고백을 하고 말았다. 나영이와 민주는 끝끝내 머릿속으로 나를 떠올리지 못했는지 뒤늦은 내 고백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드디어 의문이 풀려 속이 시원하다고 말했다.
3년 전부터 지금까지 나는 연말마다 육아 동지들에게 책 선물을 하고 있다. 친구들이 선물을 받고, 고마움을 전할 때마다 나는 받는 기쁨보다 주는 기쁨을 훨씬 더 크다는 것을 느낀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행복함이었다. 이 행복이 선순환되는 것도 너무 좋았다. 호정언니는 내게 책 선물을 받고, 주변 지인에게도 책을 선물했다고 말했다. 작은 선물 하나로 행복은 돌고 돌았다.
책 <김경일의 지혜로운 인간생활>에서는 행복의 순환고리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러 심리학 연구를 살펴보면, 행복한 사람은 이타적인 행동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행복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훨씬 더 친절하게 행동하는 경향이 높고,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해서 다른 사람을 돕는다고 해요. 그렇게 도움을 받은 사람은 행복해지고, 그 행복해진 사람이 다시 다른 사람을 도우면서 이타성과 행복의 순환고리가 만들어집니다.
행복의 순환고리를 만든 우리는 이미 행복한 사람들이다. 나는 이 행복의 순환고리가 끊어지지 않도록 계속해서 연말에 육아 동지들에게 선물을 하려고 한다. 더 많은 이들이 행복의 순환고리 속으로 들어올 수 있길 바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