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터면 <무언가족>이 될 뻔했다

by 니콜

매주 금요일 저녁은 기숙사 생활을 하고 집에 온 고3 딸아이와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내는 유일하고 소중한 시간입니다. 저도 그렇지만, 아이도 그 시간만큼은 온전히 부모에게 위로받고, 인정받으며 편안해지고 싶은 시간일 겁니다.


그 시간을 온전히 기분 좋게 즐기고 싶기 때문에 공부 이야기는 하지 않고, 학교에서 있었던 재미난 에피소드나 기숙사 룸메이트들과 나누었던 고민 이야기, 남자친구 이야기(벌써 400일이 넘었다고 하더군요),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잡다한 이야기들을 하며 맞장구도 치고, 웃기도 하며 가볍게 흘려보냅니다.


이번 주 딸아이의 이야기 보따리 주제는 '400일이 넘은 남자친구'에 대한 것이네요.

"엄마, 00와 벌써 400일이 넘은 거 알아? 우리가 400일을 한 번도 안 싸우고 지냈다니까 친구들이 대단하다고 하더라고. 오늘도 학원 가기 전에 저녁을 같이 먹으며 00랑 이야기를 하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엄청 웃었더니 학원 수업시간에 기운이 다 빠져버린 거 있지"


그런데 거실에서 TV를 보며 아이의 이야기를 엿듣던 남편이 찬물을 끼얹고 말았습니다.

"지난주에는 세상과 단절하고 공부만 하겠다더니, 무슨 300일, 400일을 챙기고 있어?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제대로 독기 품고 공부 좀 해봐"라고 말이죠.


조용히 듣고만 있던 아이는 갑자기 폭풍 눈물을 흘리며, 아빠는 자기가 학교에서 어떻게 생활하는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말하냐고 떨리는 목소리로 속상함을 쏟아냅니다.

"매일 6시 30분에 일어나서 1시에 잠들 때까지 5~6시간밖에 못 자면서 공부만 해요. 오늘도 애들 다 점심 먹을 때 수학 특강 신청해서 쌤이랑 점심도 못 먹고 공부하다 왔다구요. 00와 저녁 먹으면서 처음 웃으면서 이야기한 거야. 집에 오면 공부 이야기하기 싫어서 매일 논 이야기만 하니까 아빠는 내가 학교에서 놀기만 하는 줄 아나 본데, 저도 하루하루 애쓰고 있다구요"라고 말이죠.


평화로울 것만 같았던 금요일 저녁은 그렇게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남편이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고등학교보다 몇 배는 비싼 기숙사 학교에 다니다 보니 남편 월급의 대부분이 아이 등록금과 학원비로 지출되는 통에 허리가 휠 지경입니다. 거기다 코로나에 감염이라도 되면 고3 딸에게 피해가 간다며 저녁 모임도, 좋아하는 골프 약속도 잡지 않고 고3 아빠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아이의 성적은 계속 제자리걸음이니 여간 답답한 게 아니겠지요. 더군다나 중간고사를 치르고 온 아이는 "이제 세상과 단절하고 정말 공부만 할 거야"라며 굳은 각오를 내비쳤기에 눈빛이라도 달라져 있기를 바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안방으로 들어가 남편에게 조심스럽게 사과를 권해봅니다.

"자기야! 조금 참지 그랬어. 아이가 좀 진정되면 등 한번 토닥이며, 너의 노력을 몰라줘서 미안하다고 한마디만 하고 와요"

하지만 남편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침대에 걸터앉아 핸드폰만 만지작 거립니다.

대답 없는 남편을 바라보던 저는 조용히 거실로 나와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 있고, 식탁에 앉아있던 아이는 눈물을 훔치며 방으로 들어갑니다.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내던 금요일 저녁, 저희는 갑자기 <무언가족>이 되었습니다.


한국분노관리연구소장을 하시는 이서원 박사는 사람 사이에는 <말 길, 마음 길, 사이 길> 이렇게 세 가지 길이 있다고 말합니다. 말이 마음을 다 담지 못하고, 마음은 말을 미처 따라가지 못할 때 그 사이에서 상처를 주게 된다는 것인데요.


부모란 특히 더 말 길과 마음 길을 잘 살펴야 하는 것 같습니다. 말이 마음을 따라가지 못하면 아이에게 상처를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늘 조심스럽고, 버거울 때가 많습니다. 하고 싶은 말은 100가지인데, 잔소리로 들릴까 봐 한 가지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일단 들어주는 것을 택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오는 아이와 눈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하는 것만으로도 아이는 충분히 위로받고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서 어머니를 창조했다'라고 하잖아요.


잠시 무언가족이 된 우리집에 재잘거림이 다시 찾아올 수 있도록 사과에 서툰 남편을 다시 꼬셔봐야겠습니다. 그리고 아이에게도 아빠의 진짜 마음길이 무엇이었는지를 제대로 알려줘야겠지요.


엄마라는 직업은 그래서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끊임없이 들어주고, 끊임없이 공감하고, 끊임없이 조율하고, 끊임없이 참아내야 하니까요.

그래도 전 엄마라는 직업이 참 좋습니다.


남편은 잠들기 전에 아이에게 장문의 문자를 보냈다며 저에게 보여줍니다. 저는 남편의 문자에 엄지척을 날리며 잘했다고 토닥입니다.

"잘했어. 자기야! 내일 아침에 학원에 데려다주는 차 안에서는 문자로 했던 속마음을 아이에게 이야기해줘 봐요. 아빠도 우리 딸이 애쓰고 있는 거 잘 안다고... 그리고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어 대견하다고... 00와의 400일도 축하한다고... 말이야"

과연 아빠는 말로 표현했을까요??

저도 더 이상은 물어보지 않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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