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자로 이직한 직장인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빨리 가고 싶다면 천천히 가라니.
이게 무슨 말이지?
빨리 가려면 빨리 시작하고 빨리 진행하고 빨리 결과를 내어야 모든 전반이 ‘남보다’ 빠른 것 아닌가?
이직한 사람이라면, 특히 관리자 (팀장 이상)로 이직했다면 이 “빠른 결과”를 위한 조급함은 더욱 가속도가 붙어 있을 것이다. 새로운 동료들, 팀원들, 새로운 환경, 직무는 같더라도 회사가 바뀌면 새로 익혀야 하는 업무 내용과 terminology 들은 물론이고 전임자가 하던 업무 파악과 내 이직 시점과 상관없이 진행되고 있던 중요한 프로젝트들의 콘텍스트도 파악해야 하는 것은 기본이고. 나를 뽑은 상사와 합을 맞춰가야 하는 데다가 (대개는 이직 당사자가 먼저 맞춰야 하는 경우가 많겠다.) 동료들 (=잠재적 경쟁자들) 성향도 파악해야 노선을 정핥테고, 무엇보다 요즘 SNL 애까지 나오는 MZ팀원들과도 관계를 잘 만들어서 상사 (즉 나) 때문에 힘들어서 나간다는 소문이 돌거나 블라인드에 나를 특정하는 글들이 올라오지 않도록 해야 하는 - 이직하지 않았다면 한 번에 고민해야 할 것들도 아니었을 것을- 부가적이지만 무척 중요한 과업까지.
그리고 첫인상이 백만 년 간다는 금과옥조를 받들자면 출근할 때 용모 단정은 기본이요,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이름은 절대 못 외우지만) 웃음과 친절을 장착하고 근무해야 한다는 것은 여간 스트레스가 아닐 것이다.
1996년에 글로벌 음반회사의 레이블 마케팅 매니저로 회사 생활을 시작한 이후 2023년인 지금까지, 27년 동안 8번의 이직을 통해 지금의 9번째 회사로 옮긴 후 본사의 리더들에게 가장 많이 들은 말은 “Take slow to go fast” (빨리 가고 싶으면 천천히 가라 - 호흡을 천천히 가다듬어라)라는 말이었다. 처음엔 무슨 말이지? 했다. 30년 가까운 경력으로 이직한 내 입장에서는, 그리고 26년간 마케팅만 하다가 조금은 생소한 테크 제품과 앱 내 서비스와 크리에이티브 프로덕션을 책임지는 자리로 옮긴 상황에선 이 낯선 업무를 통해서 언제 어떻게 ”빨리 “ ”임팩트 있게 “ 나의 가치를 입증할 것인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런데 알아야 할 것 (과거에 일어난 콘텍스트와 결과)에,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 (무수한 배경 설명들과 함께)을 파악하는 것도 허덕대는데 거기에 더해 미래에 본인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확답을 바라는 팀원들과 조직의 미래를 위해 너무 많은 새로운 프로젝트를 벌리는 본사 사이에 끼인 신입 관리자인 나는 급기야 수많은 메모 파일들과 이메일, 슬랙 메시지 더미에 깔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읽어도 없어지지 않고 더 빠른 속도로 쌓이는 이메일은 엄청난 세포분열을 하는 단세포 동물 같았고,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아 볼드체가 쳐진 슬랙 메시지는 늘어만 갔다.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27년 동안 마케팅 전문가로서 수많은 성과를 팀과 함께 만들어 내고 그 팀들을 성장시켜 온 나인데, 그리고 이직하는 곳마다 빨리 습득하는 것이 나의 가장 큰 강점 중 하나인데, 정보 더미에 깔려서 무엇부터 먼저 해야 할지도 파악하지 못한 채 그저 바쁘게만 왔다 갔다 하고 있다니. 빨리 팀들의 입에서, 본사 리더들의 입에서 “과연 잘 채용했다” 는 말이 나오게 해야 하는데. 그래야 내 자리를 보전받고 입지가 단단해지는데. 성과를 어떻게 보여줘야 하지?
이런 조급함이 지배하게 되면 놀랍게도 인간의 뇌는 이성을 잃어버리고 우선순위를 파악하는 객관성도 놓아 버린다. 본질에 충실해서 나에게 주어진 태스크를 객관적으로 분석한 뒤 이직한 지 3개월 뒤, 6개월 뒤, 1년 뒤 각각 무엇이 필요할지 마일스톤을 그리기보다는 (전 직장들에선 숨 쉬듯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보이는 것”에 집착하게 된다. 거창한 워크숍을 기획하고, 워크숍이 있어 보이게 하기 위한 파워포인트를 만들고, 그 파워포인트를 중요한 스테이크홀더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어떻게든 쇼케이싱하려 하고.
그러다 보면 중요한 것을 놓치기 십상이다. 그렇게 좌충우돌하고 있는 나를 팀원들은, 상사는, 조직은 어떤 눈으로 바라볼 것인가 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자기 객관화로부터 철저히 멀어지는 것이다. 나에게 조직이 요구하는 것은 오랫동안 이 회사에 있어 왔던 사람들처럼 성과를 내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왔기 때문에 줄 수 있는 새로운 시각, 그리고 그 시각을 기존 시스템과 어떻게 잘 융화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인사이트 있는 제안일 것이다.
그리고 회사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현실적이고 객관적인 조직이기 때문에 이 새로운 시각과 기존 시스템의 융화조차도 “지금” 만들어 내길 원치 않는다. 아니, 아마도 지금 그런 융화 아이디어를 낸다면 반발이 더욱 심할 것이다. 융화의 탈을 쓴 기존 시스템 전복, 즉 ‘너네는 지금껏 이런 생각도 안 해봤어’ 하는 오만한 시각을 지울 수 없는 설익은 제안인 것을 조직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조직이 바라는 “기존 시스템과의 융화를 이루는 새로운 시각 한 스푼”은, 기존 시스템을 제대로 이해하고 체화했을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존 시스템을 체화하려면 절대적인 물리적 시간이 필요하다. 조직마다 3개월, 6개월 또는 1년이 걸리는 곳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타임라인 그 자체보다는 ’빨리 입증해야지 ‘ 하는 조급증을 내려놓는 것이다. 이직하며 원했던 것처럼 더 빨리 발전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이직한 지금은 천천히 가야 한다. 천천히 가면서 시스템의 체화 및, 주변인들의 시각과 피드백을 천천히 소화하고 또 생각을 정리하며 우선순위를 마련하는 것. 쉽게 들리지만 가장 어려운 일일 것이다.
특히나 관리자로 이직했다면 지금까지의 성공의 리듬을 잠시라도 내려놓고 싶지 않은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
“과한“ 욕심을 내려놓고 더 멀리, 빨리 가기 위해 천천히 가는 것. 도인의 말처럼 들리지만 어떤 말보다 비즈니스 피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격언이 아닐까.